[심명희의 행복선언]

“선생님 믿음이 부족한가 봐요. 제 의지가 이렇게 약한 줄 미처 몰랐어요. 힘듭니다”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고시생 ‘허준’의 호소다. 사법고시 1차 합격자발표를 앞둔 4월의 고시촌은 긴장과 불안으로 살벌하다. 합격자는 2차 준비의 압박감에 불합격자는 좌절로 심란하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고시촌’은 대한민국의 청년 약 5만여명이 오직 ‘고시’를 위해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온종일을 ‘열공’ 하는 곳이다. 고시촌 한 가운데 자리잡은 ‘사랑샘’은 고시생들을 위한 무료 쉼터다. 차와 음악, 신앙과 심리상담으로 젊은이들에게 고시촌 생활의 고민을 덜어 주자고 한 변호사가 기증한 고시생들의 사랑방이다. 말이 사랑방이지 병원으로 치면 응급실이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 십년동안 이래저래 고시촌을 떠나지 못하고 수인생활을 하는 고시생들은 ‘고시병’에 걸린 환자다. 그중에서도 증증환자 무늬는 고시생이지만 속사정은 가족과 친구와 인연을 끊은 채 유배생활을 하는 자폐증 환자다. 그들에게 쉼터의 봉사자는 유일한 대화 상대요 상처입은 그들의 마음에 작은 응급처치라도 해 주는 곳이다.

고시생 허준은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과 이름자가 같아서 쉼터에서 허준으로 통한다. 나이는 서른 다섯.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과정을 마친 의사다. 졸업과 동시에 고시를 시작했다. 변호사가 되는 것이 1차 목표, 다음이 국회의원, 정계진출이 목표다. 동료들은 그를 응원했다. 국회로 보낼 의사 한 사람 만들자고 기대와 힘을 실어주었다. 개업의인 한 선배는 후원을 자처했다. 매달 삼백만원을 꼬박꼬박 그의 통장에 넣어 준다. 고시에만 올인하려고 고시촌에 들어온 지 4년, 1년 안에 합격해서 금의환향하리라는 자신감은 4년이 지난 지금 행방불명이다. 잠자리에 누우면 불합격의 어두운 예감이 매일밤 그의 목을 죈다.

“찰라였어요.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후려쳤어요. 제 신세가 거미줄에 걸린 파리새끼나 다름없어요.”

4번째 불합격앞에서 실패와 수치를 보상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느꼈다. 합격자 발표에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딛고 있는 땅덩어리가 꺼져버렸다. 그날밤 고시원으로 돌아온 그는 날카로운 면도날을 들었다. 손목을 그으려는 순간 그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손목에 매달린 팔찌묵주였다.

6년전 공보의 시절 시골 보건소에서 함께 근무한 김 선생은 그의 선배이자 형님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가톨릭 신자인 김 선생은 팔찌 묵주를 선물했다. 보건소를 떠나는 날 “기도할께“라는 약속과 함께. 그는 존경하는 선배를 생각하면서 팔찌묵주를 즐겨 차고 다녔다.

그는 면도날을 버렸다.얼마나 울었을까? 선배가 생각이 났다. 전화했다. 다음날 그는 쉼터를 찾아왔다. 입구에 붙여놓은 ‘가톨릭 신앙을 소개합니다’를 봤다며.... 고시생 허준은 그렇게 해서 가톨릭 신자로 다시 태어났다.

▲ 1999년도 방영된 mbc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

몇 년전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50%가 넘는 시청률를 보이며 인기몰이를 했다.마침 의약분업을 앞두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다섯차례나 병원문을 닫고 거리로 뛰쳐나오던 터였다. 드라마 속 허준은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위중한 환자를 만나자 출세와 부귀영화의 욕심을 접고 환자를 돌본다.

한양으로 가던 과거길을 되돌아 가난한 환자곁으로 돌아온 그는 ‘동의보감’으로 그의 의학을 집대성한다. 그의 의학은 오늘 세계 보건 기구가 정의한 건강의 의미 ‘생물 심리 사회적 안녕상태’ 즉 몸과 마음과 사회가 하나라는 정의와 통한다. 그는 그 시대의 문화적 프리즘인 ‘음양오행’이라는 틀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기능적 신체 구성요소를 표현했다. 오늘날의 해부학에 바탕을 둔 생물의학을 전제로 400년 전의 의학을 바라보면 비과학적으로 여길테지만 ‘지금여기’의 시선으로 ‘그때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이니 그 시대의 시선으로 인체를 설명한 방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우주와 몸이 하나라는 것은 한마디로 몸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시대의 병을 앓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심리 사회적 설명과 처방없이는 인류를 구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몸이 일정 부분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자각이 세계보건기구로 하여금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닌 생물 심리 사회적 안녕상태로 정의하게끔 한 배경이다.

라일락 진달래 개나리 철쭉 벚꽃이 만발하는 생명의 시작인 4월, 나는 드라마 속 허준이 과거급제의 욕심을 접고 ‘우주로 열린 큰 몸’을 다루는 ‘큰 의사’로서 시대의 고통이 새겨진 민초의 몸을 돌보는 명의가 된 것처럼 이제 막 가톨릭 신자로 다시 태어난 고시생 허준도 질병으로 생긴 환자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 시대의 ‘큰 의사’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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