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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시국회의 긴급토론회 발제문

먼저 부끄러움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30일 6시경에 서울 시청 광장에 나오신 분들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으시겠지만 잃어버린 광장을 다시 찾겠다고 제기동 성당에서 결의에 차 출발한 신부들은 십여 명 정도였습니다. 서울 시청 광장에서는 더 했습니다. 미사를 시작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우리들 앞에 있었던 것은 어린이들 캠프에 가서 쓰는 아주 작다 못해 앙증맞은 앰프 하나 달랑 있었을 뿐입니다. 그나마도 고장이 나서 점점 늘어나는 시민들과 신자들과는 전혀 의사전달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무처장으로서 참 나도 너무했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저 서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하나 하나였습니다. 광장을 메운 신자들과 시민들, 마련한 공간이 부족할 만큼 채워졌던 신부들의 자리, 적은 용량의 방송 기재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던 미사와 행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늘 하느님 나라를 향하며 사셨던 수도자들, 복음을 삶으로 이어오신 교우들, 그리고 옳은 일에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이 마련해 준 자리가 바로 6월 30일의 시청 광장이었습니다.

사실 5월의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많은 요청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5월말부터 강경일변도로 돌아선 진압을 겪으면서 광장과 거리에 있던 많은 분들이 사제단 어떻게 된 거냐고, 뭔가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새벽에까지 전화와 문자가 왔었습니다. 그저 안타까움에 마음을 졸이며 몇 번 촛불 문화제에 다녀온 것으로 미안함을 달래 왔습니다. 그러던 중 회의를 통해서 23일에 시국미사를 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시국미사는 또 한 주를 늦춰야 했습니다. 사실 사제단 내부에서도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구성원들 모두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늘 그렇듯이 과연 얼마만큼의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촛불을 대표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또 하나의 관점이 있었는데 우리가 과연 촛불을 대표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관점조차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후의 성찰입니다.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사제단은 지난 30여 년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모임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부와 외부에서 어려운 시기에 국면을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압박이 늘 있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려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도해야 하고 지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심 있었고, 이에 대한 반성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아름답게 촛불을 들고 멋있고 행복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젊은 촛불들을 보면서 그저 마음으로부터 응원하고 개별적으로도 얼마든지 함께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6월이 되고 촛불은 다시 균형을 잡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아름다운 이들이 폭도가 되어 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결심한 것이 그 허접한 6월 30일의 시도였습니다.

그 허접한 시도를 통하여 광장에 들어 안게 된 저희는 참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 사실 불난 집에 뒤늦게 쫓아가서 물 몇 바가지 뿌렸을 뿐인데 사람들은 저희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촛불이 살아났습니다. 계속해서 어리둥절해 있는 저희들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격려가 있고난 다음의 일은 끊임없는 대화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동안 촛불과 함께 했던 분들께서 지나간 날들에 대한 억울함에 대한 호소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요구,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안타까움과 전망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첫날의 하룻밤은 모두 한잠도 자지 못한 시끄러운 밤이었습니다.

스스로 촛불이 되거나, 촛불을 끄거나 온전히 개인적인 소신과 판단의 문제입니다.

촛불을 앞에 두고 밤새 열띤 토론을 하는 사람들, 라면을 끓여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주시는 분, 그러다가도 끊임없이 텐트에 오셔서 불편함이 없는지 살펴주시는 분들........ 저희가 광장에 텐트를 치고 시민들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의 자리에 저희가 보호를 받으며 안착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저희는 그동안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현상을 보고 우리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과거의 사건과 맞물려서 설정하려하고 설명하려 했던 것이, 이 국면을 어떻게 펼쳐나갈까를 궁리하면서 앞장서려 했던 것! 바로 저희가 행한 최대의 오류였습니다. 서울 광장에서나, 을지로 지하도에서나, 청계 광장에서나, 세상 어디에서나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가장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째서 갈릴래아로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하셨는지를 깨닫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디서건 그분들의 이야기를 가장 낮은 자세로 잘 듣고 종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일상으로서의 갈릴래아를, 촛불을 밝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광장 생활을 쫓기듯 접었습니다. 변명 같지만 다음날 주일미사에 대한 압박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제단이 촛불을 살린 것이 아니라 촛불을 껐다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저희가 촛불을 끄거나 켤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스스로 촛불이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촛불을 끄거나 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적인 소신과 판단의 문제입니다. 그동안 광장을, 거리를 밝혀왔던 촛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켜라고 해서 켠 촛불이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응답한 것이 촛불입니다. 누가 켜라고 해서 켠 촛불이라면 그야말로 불순한 촛불이겠지요. 하지만 그 많은 촛불들 중 어느 하나도 누가 시켜서 들고 있었던 촛불은 없었습니다. 국면이 좋다고 해서 안 들 촛불을 들지도 않았으며, 상황이 어렵다고 하여 들던 촛불을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촛불의 전망에 대해서 제 짧은 생각을 나누어 볼까 합니다.

사제단 내부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는 싸움의 명수인 사제단! 이 그것입니다. 제가 91년부터 사제단 활동을 해왔습니다. 자주 빼는 편이었는데도 한데 잠도 많이 자고, 거리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싸움에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국가보안법도 무사하시고, 효순이 미선이 치고 달아난 미군들도 안녕하십니다. 새만금은 물막이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는 아직도 우리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대추리에는 미군들이 안락하게 거주할 곳을 마련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혹시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으시다면 앞으로 사제단을 빼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매번 지더라도,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한때 구성원으로라도 자리를 채웠던 사제단이 이제는 사람 수를 손꼽을 정도의 모임이 되었더라도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면 또 그렇게 있는 모습 그대로 서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희는 사제단 없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촛불도 역시 그렇습니다. 앞으로 촛불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그 가는 길을 좁게 만들 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촛불로 인해서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국민들을 외면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촛불은 광우병 쇠고기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소중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순간마다 그 자리와 시기를 막론하고 켜질 것입니다. 이겨서 성공하는 촛불이고, 져서 실패하는 촛불이 아니라 국민을 국민이게 하는 촛불로, 국민들의 혼을 담는 혼불로 진화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 촛불은 자신의 양심과 희망을 담은 고유한 한 인간을 담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상봉 선생께서 전개하시는 촛불정국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

덧붙여서 몇 가지 성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마음들이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대립구도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것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보수의 그룹에 놓고, 누구를 진보의 그룹에 담고 사안에 상관없이 적과 친구로 나누는 것은 참으로 비복음적입니다. 시청 광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옆에서 큰 소리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광장의 한낮에는 지나가다가 손가락질을 하고 고함을 치며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저 사람 좀 쫓아내지, 누가 좀 말려주지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고, 그들을 함께 살아가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내친다면 우리는 또 그렇게 좁고 좁은 세상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그 원인에 대해 고민하고 대처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싫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맞서서 싸우는 세상의 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서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고 저주를 퍼부으며, 삿대질과 주먹질로 끊임없이 미워하는 것! 우리가 악의 원천이라고 하는 그 최초로부터 인간 세상을 갈라왔던 악의 승리입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악보다 조금 더 큰 악의 배후를 보는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 종교나, 타 단체와의 비교입니다. 누구든지 선의를 가지고 일하는 이들은 우리의 동지들입니다. 서로 사정이 어려울 때와 좋을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나 방향이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광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토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자칫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비교는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토론과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는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닌 교회 지도층에 대한 기대와 실망입니다. 한상봉 선생께서는 세계와 한국 천주교회의 보수화에 대해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또 일각에서는 사제단이나 교회의 뜻있는 활동가들이 위축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한국 주교님들의 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실 교회라는 조직에서 일하는데 있어서 사제에게 주교의 존재는 참으로 큽니다. 그분들의 손에 두 손을 담고 순명을 서약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공적인 움직임은 그분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제 개인의 결단입니다. 촛불이 그 촛불을 든 사람의 결단이듯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한 인간의 결단이자 한 사제의 고유한 결단입니다. 물론 주교님들께서도 격려해 주시고, 뜻을 가진 본인도 그 격려에 고무 받아 온전히 투신한다면 더 없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마음에도 없는데 주교님들이 등을 떠밀어 나가는 시국미사라면 이미 의미 없는 투신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결단으로 인해서 사제인사나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 감내해야 하는 것이 결단의 결과입니다. 이미 뜻이 없는 주교님의 결단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빠른 포기는 없습니다.

국민들이 많이 답답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자랑스러운 조국과 자신과 이웃이 건강하게 살아갈 공간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답답함은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빨리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를 소원하고 이를 위해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지기를 소망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길도 빠른 길은 없습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올곧게 그 길을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이미 촛불은 아름답고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승구(신월동성당 주임사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처장)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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