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소설-48] 동행-유다와 예수

어둠이 내렸다. 새들도 모두 숲속에 깃들었는지 가을 풀벌레 소리와 요르단 강이 굽이치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연의 소리는 금방 자연으로 돌아가 그 품에 안겨 잠들어버렸다. 모든 소리가 깊은 잠에 들었다. 자신의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죽음일까. 집을 나선 이후로 그이는 많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 이후엔 맨 먼저 소리가 사라졌다. 요한도, 라자로도 그랬다. 뜨거운 불꽃 위에 누운 카루라도 그랬다. 어둠 속에서 그이는 죽음의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다. 그렇다. 이렇게 깊은 어둠도 결국 다시 돋는 아침 햇살에 밀려나듯이, 죽음도 역시 환희로운 삶 앞에서 숨을 죽이고 물러 설 것이다.

그이는 다시 냉정한 마음으로 생각의 출발점을 움켜쥐었다. 그이는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자신이 있었다. 카루라와 함께 수많은 기적을 만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이의 대문 앞에 줄을 서게 될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병든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것이므로 그이가 치료하는 환자들의 줄서기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돈과 명예도 함께 줄을 설 것이다.

그이는 컴컴한 허공에 오른 손을 뻗었다. 허공엔 반짝이는 세겔과 달란트와 데나리온이 가득 쏟아졌다. 허공에 뻗은 오른 손바닥에 그것이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돈 앞에서는 세속의 최고 권력도 숨을 죽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채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쏟아지는 동전들 뒤에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동전이 금방 멈추었다. 잠시 후에 그이의 왼쪽에 동전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왼손을 내밀었다. 분명히 손바닥에 반짝이는 동전들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동전은 하나하나가 나름의 생명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멈추었다. 또 잠시 후에 움막 밖에서 동전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몸이 움막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것도 금방 멈출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 동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야 한다. 인생은 날마다 동전이 쏟아지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 걸음이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날마다 위태롭게 걸어서 새로운 동전을 찾아나서야 한다.

유다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갈릴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이의 뒤에는 항상 선지자 요한의 후계자라는 후광이 빛나고 있었다. 지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인근의 랍비들도 그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릴리에서 가장 존경받던 필로테리아의 요나단도 죽었다. 요나단의 제자들도 그이에게 와서 이제 자신들의 스승을 대신하여 갈릴리의 깃발을 높이 올려달라며 사정했다.

다시 동료들을 모아 딱 일 년만 부지런하게 일을 한다면 갈릴리의 종교적 맹주가 되어 예루살렘의 세속적인 권력과 썩어빠진 성전의 사제귀족들을 압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신의 사제로써 그 분이 위임한 말씀의 권력은 그 어떤 세속적인 권력보다도 강력하다. 모든 이들이 그이를 우러르며 존경할 것이다. 적절하게 지혜를 발휘한다면 요한처럼 비참한 죽음으로 마감하지 않고 손에 거머쥔 말씀의 권력을 영원히 대물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녀와 함께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이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평범한 삶을 누구보다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도 생각했다. 권력도 부도 명예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넘어설 순 없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영혼뿐이던가. 아니다. 이 영혼을 담고 있는 육신도 영혼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 그릇 없이 물을 뜰 수 있던가. 육신이 없는 영혼은 허무하게 흩어져 버릴 뿐이다.

그이는 그녀를 통해서 비로소 육신의 중요함을 알았다. 육신의 기쁨도 알았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그리웠다. 사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녀의 생각은 끊임없이 끼어들었다. 끼어든 것이 아니라 생각의 한 중심에 항상 존재했다. 예전엔 거추장스럽게만 생각했던 그이의 누추한 육신이 그녀에 의해서 빛나지 않았던가. 육신이 없는 영혼은 햇빛아래 이슬과 같은 것이리라.

광야에서 외치던 요한도,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이 육신의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알았을까. 그들 모두 이 환희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이다. 율법 속에서 항상 우리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죄를 주시는 야훼도 이 육신의 기쁨을 과연 알고 있을까. 아니다. 그 분은 이 육신의 환희를 알고 있는 인간을 질투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갈수록 우리들에게 더 모질게 구시는지도 모른다.

그이는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마리아 마리아, 미리암네’ 오로지 그이만이 부를 수 있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미리암네 미리암네’

그녀가 다가왔다. 바로 그이의 앞에서 튜닉을 벗었다. 속살이 비치는 튜닉이 스르륵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그이는 그녀의 다리사이 꽃송이에 얼굴을 묻었다. 온 얼굴이 꽃송이에 맺힌 이슬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이는 바르르 떨고 있는 꽃잎을 정성스럽게 핥았다. 핥을수록 꽃송이가 커졌다. 하얗게 빛나던 꽃송이가 커지면서 검게 변했다. 죽음과 같은 검은 빛, 저 깊은 속에서 하얀 빛이 그이를 불렀다. 그 속엔 죽음과 생명의 빛깔이 함께 들어있었다.

혀끝을 내밀어 저 하얀 빛을 핥아야 한다. 혀를 길게 내밀면 내밀수록 하얀빛은 조금씩 더 멀리 물러났다. 그이는 자신의 머리를 꽃송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날 밤 서로 동시에 활짝 피어올린 밝은 꽃송이들은 자취도 없었다.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커진 검은 꽃송이가 그이의 몸을 삼켜버릴 듯이 꽃잎을 쫙 벌리면서 달려들었다. 마치 산처럼 거대한 짐승의 한껏 벌린 아가리처럼 그이의 몸을 단숨에 삼켰다. 검은 꽃 이파리들은 예리하게 벼린 칼날이 되어 그이의 살을 한 겹씩 저며서 벗겨냈다. 그래도 좋았다.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고통의 신음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를 갈구하는 신음소리였다. 그러나 한순간에 거대한 검은 꽃이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엔 초라한 육신 하나가 앉아있었다. 수음하듯이 허무했다. 항상 수음의 뒤끝은 자신의 등 뒤로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게 가라앉았다.

▲ 그림/홍성담

유다는 잠에서 깼다. 예수의 움막이었다. 그러나 낯설지 않았다. 잠결에 엄한 아버지가 오랜만에 그의 메마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던 것이 생각났다. 움막에서 나오려다 자신의 소매 속에서 돌돌 말려있는 파피루스 종이를 보았다. 예수가 남긴 편지였다. 맨 밑에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예전 젊은 날에 세포리스 공사현장에서 보았던 그 물고기 그림이었다. 그러나 세포리스에서 가구를 만들던 그 청년과 예수를 함께 생각하진 못했다. 그이를 동료들과 함께 한 달을 더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예수 그이는 무정한 사람이었다. 엘나단과 마레사와 대부분의 동료들이 하로드 계곡을 떠났다. 아마 그들은 요하임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다시 보름을 더 기다렸다가 안드레아와 시몬도 일단 자신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안드레아가 울먹였다. ‘유다형제, 마땅한 곳이 없으면 언제든 베싸이다로 오게.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으니’

유다가 안드레아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소. 나도 오랜만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발길이 닿으면 베싸이다에 들리겠소’ 유다는 갖고 있던 돈을 절반으로 갈라 엘나단에게 이미 주었고, 남은 돈을 안드레아에게 건넸다. ‘자네가 이것을 보관하고 있게나. 혹시 우리들이 다시 모이게 되면 귀중한 종자돈이 될것이네. 그리 큰돈이 아니니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자네가 알아서 어디 좋은 곳에 사용하게’

유다는 하로드 계곡을 수습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잡았다. 고향으로 향하는 안드레아와 시몬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고향길이 그리웠다. 요르단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요한의 강건한 모습이 사무쳤다. 아파스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서 잠시 요한의 생각에 빠졌다. 그는 왜 연약한 예수를 선택했을까. 아니다, 예수를 선택한 것은 결국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이 먼저 예수를 선택했고, 요한의 결정을 뒤늦게 확인했었다.

그는 바로 일 년 전쯤에 의욕적으로 동료들과 함께 계획하여 세례공동체 마을을 만들려고 했던 요르단 강 하류의 모래둔덕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이제는 결국 절망하고 포기한 것이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 보고나서 고향길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마을 이름을 ‘신이 깃들은 사람의 마을’이라고 지었다. 지금도 그의 허리에 멘 보따리 속 어딘가에 당시 그 계획을 꼼꼼하게 그려 둔 시트천을 겹겹이 개켜진 채 보관하고 있었다. 해가 막 정오를 비켜섰다. 요르단 강을 따라 반나절이면 그곳에 도착했다.

모래둔덕은 여전했다.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계획도를 보면서 동료들과 함께 여기저기 박았던 표지 말뚝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그때 하나하나의 말뚝마다 세상의 모든 희망을 모아서 박았다. 그 희망이 모래에 박힌 채 썩어가고 있었다. 모래둔덕을 지나 숲 언덕 쪽으로 걸어갔다. 저쪽 한켠에 작은 움막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움막을 쳤다면 누군가 이곳 어디에 사람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굴까. 두리번거리면서 부근에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사람도 예전의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저곳에 움막을 쳤을까.

그냥 숲 언덕을 넘으려다가 궁금해서 움막 앞으로 걸어갔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발자국 소리를 억지로 크게 냈다. 그래도 소식이 없었다. 헛기침을 해보았다. 그래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움막을 만든 솜씨가 어디서 많이 본 듯 눈에 익었다. 움막 입구에 가리개가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리개 위에 무엇인가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칼끝으로 깎아 파놓은 작은 나무판이었다. 갑자기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이다. 그이가 이곳에 왔다’ 그는 가리개를 열고 컴컴한 움막 안이 눈에 익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쪽에 작은 보따리가 있었다. 분명히 그이의 보따리였다. 그이가 이곳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이였다.

<계속>

홍성담
/ 안토니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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