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회의 긴급토론회 발제문

 0. 토론자로 제안 받음

천주교시국회의에서 토론을 제안 받고 어떤 이야기로 토론을 해야 하고 그 목적에 본 토론자가 부합할까를 고민하였다. 본 토론회의 목적이 발제문의 첫머리 ‘촛불정국을 통하여 드러난 한국천주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고, 사회복음화와 교회쇄신을 갈망하는 천주교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늠해 보는 기초자료를 제공하려는 의도’라면 오히려 밖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딴지걸기가 되면 어쩌지라는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본 토론문은 발제문을 일일이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그리스도교’라는 나름의 공통성을 갖고 촛불정국의 천주교의 대응을 일면 살피며, 동시에 본인이 속한 개신교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돌아봄으로써 현재 ‘그리스도교’가 처한 총체적인 ‘위기의식’을 전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하지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요점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정리하며 전체 토론 때 부족한 부분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채우고자 한다.

1. 양심선언과 예수

우연인가 필연인가? 지난 25일 4시 기독교회관에서 예정된 현역 의경인 ‘이길준’씨의 양심선언이 예정되었다가 취소되었다. (기자들은 가지 않고 진행되지 않을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정황은 현재 알 수 없다. 이 토론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받은 ‘양심선언’의 소식은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였다. 왜? 기독교회관이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에서 진행할까? 양심선언은 도대체 왜 필요할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종교와 양심] 왜 이리 친근할까? 아니 마치 동의어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긴급 토론회는 종교와 양심은 만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는 현실에 대해 ‘양심과 종교’를 일치시키고 싶은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현듯 ‘양심선언과 예수’가 떠올랐다.

누군가 현시국에 대해 양심선언을 하고 그는 감옥으로 가거나 험한 길을 가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이유로 들어 자신의 운동과 활동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감동한다. 이제까지 어려운 정국을 돌파할 때 개신교와 천주교의 소위 진보단체들의 주로 사용한 방법이 오늘도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정의와 양심’의 이름으로 ‘어려움의 십자가’를 개인에게 지우고 자신은 빠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예수의 십자가]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대신 죽은 존재’가 ‘살아있는 자신을 가능하게’ 했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설사 옳다고 해도 계속 재현할 필요가 있을까? 이 뜬금없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짧은 글을 시작한다.

2. 촛불에서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의 모습에 대한 짧은 생각

촛불에서의 천주교 단체들의 구체적인 대응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본인이 경험한 것에 한정된 것임을 전제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말 사제단으로 인해서 마음의 부담을 덜은 것 같아요”
“사제단에게 위로를 받은 것 같아요”
“사제단 너무 기회주의적인 것 아닌가요?”
“촛불을 볼모로 자신들의 쑈를 한판 하고 사라졌네요. 종교인들이 다 그렇지 뭐..이젠 기대 안 해요”

위와 같이 사제단에 대한 개인적 차원 평가와 조직적 차원 평가는 차이를 많이 보인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제단의 등장에 대해서 아주 긍정하는 측면과 촛불정국의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로 크게 나눠질 수 있는데, 이는 ‘광우병국민대책위’(이하 대책위)에 대한 평가를 비교해 보면 사제단에 대한 평가가 2중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제단에 대한 개인적 심정의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대책위(시민단체를 대표해서)에 대해서는 조직적 평가 외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는 사제단이 가지고 있는 2중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정의를 말하거나 행동하는 동기에 개인적 결단 (개인의 변화)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에 다니는 이름 모를 신자가 아닌 사제의 모임이라는 측면은 ‘평신도’운동과 비교하면 그 위상이 얼마나 다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천주교 내적 차이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즉,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사제단과 구별과 차이를 더욱 인정하기 어려운 촛불 사이의 거리는 그리스도교 개혁의 문제와도 연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본 토론자는 발제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유형과 진보와 보수적 성향 밑에서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교와 세상이 소통하는 방식을 보고자하며 이는 개신교 ‘광우병 대책위’에도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3. 희생양과 구세주 콤플렉스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이라는 신앙고백을 토대에 깔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한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죽고 내가 살아있다는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죽어서도 그 대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하게 ‘부채의식’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통속적으로는 “예수님이 우릴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의 삶이 구원을 얻었다”로 고백된다. 이 부채의식은 우리가 개인의 삶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하든, 사회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든 상관없이 ‘개인의 욕망을 눌러야’한다는 기본적 자세를 가져야 갚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내가 남(자신도 포함)과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동시에 희생한 만큼 내가 희생한 대상에게 ‘구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를 깔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희생양’이 되는 동시에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깊은 차원에서 비판하며 성찰하면서 ‘줌 없이 주고, 받음 없이 받아야한다’는 것으로 말한들 이 기본적 모순 관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예수의 대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적 강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고자 함이 아니고 촛불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보면서 이 2중성이 여지없이 드러남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개신교 일각에서는 ‘(아무리 해도) 연행되지 않음을 원통’해하는 목회자가 있었으며, 뭔가 한사람이 크게 죽거나 해야 이 촛불이 타오를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80-90년대 운동권’이 있었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사제단은 세상에 대한 구원병의 모습을 ‘무기한 일주일 단식’이라는 ‘희생카드’를 가지고 짠~하고 등장했다. 즉, ‘단식이라는 희생’이 없이도 ‘연행이나 한 사람의 죽음’의 카드가 없어도 함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리스도교 사제와 목사들은 [무언가 희생의 꺼리]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일주일동안 자신의 종교행사에 참여한 대중에게 ‘구원자’(구원투수)의 모습을 들고 나왔다. 물론, 표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진을 할 때나 마이크를 잡고 있을 때 주최측이 대중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청하는 부분에서는 분명 2개의 시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촛불에서 그리스도교(천주교, 개신교)는 이 두 가지 산을 넘지 못했다. 함께한다며 ‘희생’하고, 지지한다며 ‘구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모순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4. 촛불에서 배워야 할 것

촛불이 갖는 의미를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게’한다고 한다. 하지만, 촛불은 자신을 태운다는 의식이 없다. 그리고 밝게 세상을 비춘다는 의도도 없다. 그럼에도 촛불에서 이 의미를 굳이 끌어오는 의도는 무엇이고, 특히 그리스도교인이 이 촛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토론자는 앞서 설명한 ‘구세를 위한 희생’에서 이미 그 의도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촛불을 계속 희생으로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리스도교인이 촛불에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 단편적인 생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4-1. 촛불에서는 지도자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발제문에서는 평신도 운동의 현실과 중요성, 미래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에 토론자는 동의하면서도 ‘지도자와 지도그룹’의 탄생으로 연결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숱한 지도자와 지도그룹에 허덕였으며, 지금도 허덕이고 있다. 특권 사제층에 대응하는 평신도 운동은 교회개혁에서도 이젠 실효성을 다한 전략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손 놓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또 다른 지도그룹과 지도자를 육성하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반드시 다시 짚어야 하는 운동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4-2. 촛불에서는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 않다.

현재 촛불의 대안을 놓고 갑론을박 하고 있다. 이 모습 자체가 촛불이 대안을 하나로 만들 수 없음을 현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어떤 대안이 떠오른다면 그 대안은 대안대로 하나가 되고 다른 곳에서 촛불이 오를 것이다. 토론자는 이 둘의 모습을 모두 긍정하고 싶다.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관철하려고 한다면 그 의도는 촛불에 타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4-3. 촛불에서는 조직을 만들고 싶지 않다.

4-2와 같은 논의이다
.

4-4. 촛불에서는 더 이상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다. 또한 영웅도 만들고 싶지 않다.

촛불을 둘러싸고 현재 수배자를 비롯하여 많은 희생 영웅이 등장하고 있다. 촛불을 처음 들었던 소녀들의 이름과 주소, 그들의 나이를 우린 알지 못한다. 그게 촛불이다.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려 애쓴다면 촛불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4-5. 촛불에서는 그저 만남이 소중할 뿐이고 싶다.

촛불을 들고 만나고 서로 의견을 주장하고 토론하는 광장에서의 만남이 촛불의 의미라 믿고 싶고 내가 너를 위해서라든가?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든가 대상화하는 만남은 아니었으면 한다.

4-6. 촛불에게 그냥 묻고 싶다. 내가 왜 너를 들고 있는지

가는 길이 혼란스러워 보이고 힘들어 보여도 촛불은 들고 오는 사람이 있는 한 지속되지 않을까한다. 그냥 묻고 싶다. ‘어~, 오늘 약속을 취소하고 내가 촛불을 들고 나온 이유가 뭘까?’

5. 토론을 접으며...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 어떤 이는 ‘그래서 뭘 어찌하고 싶은데?’라고 묻는다. 발제문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5가지로 제안하고 있다. 본 토론자는 솔직하게 제안의 내용이 아니라 촛불을 이유로 들어 제안함에 대하여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면 5가지 대안을 굳이 촛불에서 배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 진보 운동’의 운동론이나 조직론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기에 촛불의 이름을 들고 제안하는 것의 차별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발제자의 의도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은 이런 논의가 그리스도교에서 많이 막혀 있으며 촛불이 이 논의를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개신교나 천주교가 앞으로 좀 더 촛불을 계기로 만나서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와 하느님에 대해서 진솔하게 ‘촛불’들고 이야기하길 바란다. 이것이 제2의 이명박 장로를 막는 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고민 하나, 이명박이 지금 ‘하느님이 나를 시험하고 있으며 이 시험을 극복하면 욥이 받은 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 수 있다’면 어찌해야 하나?


도임방주( KSCF 간사,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 집행위원장)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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