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소설-47] 동행-유다와 예수

그이는 아침 햇살을 온몸에 가득 안고 길릴리 호숫가의 해안 길을 따라 걸었다. 이토록 발걸음이 가벼운 것에 그이 자신도 깜짝 놀랐다. 머릿속엔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뛰었다. 마음은 지난밤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으나 몸은 자꾸만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하얀 살결과 그리고 자기의 누추한 몸 곳곳이 빛나던 달콤한 시간의 문턱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호수로 향하는 완만한 언덕들이 그녀의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를 흐르는 곡선과 꼭 닮았다. 유대 땅을 휩쓴 오랜 가뭄에도 이곳 언덕은 비옥한 땅에 온갖 작물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언덕위에 내리는 눈부신 햇살이 어제 밤 그녀의 몸을 더듬던 그의 손길처럼 미끄러져 호수의 잔잔한 수면으로 내려갔다. 마치 자신의 손을 저 갈릴리 호수에 담그는 것 같았다. 이 호수를 이곳 사람들은 갈릴리바다라고 불렀다. 갈릴리해는 이 비옥한 언덕이 생명을 낳고 기르는 발원지였다.

그이는 걸어가다가 자신의 손을 들어서 바라보았다. 아, 가늘고 메말라 볼품없는 이 손을 그녀가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그이의 손가락을 지그시 깨물었던 그녀의 수줍은 꽃송이를 생각했다. 그이는 갑자기 언덕 아래로 달려가 호수에 손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햇볕에 데워진 따뜻한 수면이 찰랑대면서 그이의 손을 휘감았다. 그이는 손바닥을 오므려 물을 떠서 입에 댔다. 아, 바로 이 맛이었다. 어제 밤 그녀의 몸 은밀한 곳에 이 갈릴리 호수가 넘실대고 있었다. 갈릴리해 북쪽으로 향하는 그이의 걸음은 힘차고 당당했다.

갈릴리해 북단 끝의 항구도시 가버나움 근처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고 동쪽 해안을 따라 걸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생각뿐이었다. 그이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나무 이파리에 앙금앙금 기어가는 털벌레까지도 모두 아름다웠다.

잔잔한 갈릴리 호수에서 그녀의 살냄새가 났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한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이토록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세상은 원래 이처럼 아름다운 것인데 자신이 미처 몰랐던 것일까. 여지껏 자신이 걸어왔던 세상은 왜 그토록 힘들고 괴로웠던 것일까. 이제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눈부신 꽃송이를 닮은 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이의 몸이 불타버릴 것 같아서 가슴이 떨렸다. 그녀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생각으로 꽉 차있는 그이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들떠 있는 그이의 머릿속에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마저도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었다. 걷지 않으면 잠시라도 견딜 수가 없었다. 불이 난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면서 그이는 걷고 또 걸었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이틀째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갈릴리를 벗어나 데카폴리스에서 일거리를 찾겠다는 생각도 이미 달아나 버렸다. 한번 불이 붙은 마음은 어떤 곳에도 머무르지 못했다. 잠시라도 멈추어 서면 그녀의 모습이 날아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이의 발걸음은 요르단 강을 따라서 남쪽을 향해 바쁘게 걸어갔다. 아무것도 바쁠 것이 없는 그이는 무엇엔가 쫓기듯이 바쁘게 걸었다.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노래가 나오고 휘파람이 나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이의 몸속에 들어가 노래로 변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그이의 몸에 들어가 천둥소리로 변했다. 아니, 그이의 몸속에 들어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작은 몸이었다. 저 요르단 강의 짙은 녹색 물빛도, 그리고 강 언덕의 울창한 숲들도, 숲속을 나는 새들도, 그들을 반짝이게 하는 햇빛도, 햇빛과 햇빛 사이를 통과해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도, 저 푸른 하늘도 모두 그녀의 작은 몸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 그림/홍성담

아파스 바위 뒤쪽의 숲 언덕은 아직도 검게 탄 숯덩이들로 가득했다. 검은 흙을 재끼고 솟은 갈대들만 무성했다. 불에 타 무너진 작은 움막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게 변한 숲 언덕 때문에 아파스 바위만 유독 하얗게 보였다. 움막과 움막을 연결하는 길들도 모두 갈대들만 무성하게 덮여있었다. 그이가 항상 등을 기대고 요르단 강을 내려다보던 종려나무도 밑둥이 꺾인 채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밑둥 바로 옆에 새로운 순이 돋아 벌써 그이의 허리만큼 자라서 빗살 같은 연한 이파리에 강바람이 휘돌았다.

그이는 겨우 길을 찾아 움막들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매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저 아파스 바위 위에 앉아있던 요한과, 자신의 품에 안겨서 죽었던 라자로가, 그리고 안드레아와 유다와 시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없는 이 숲 언덕은 을씨년스러웠다. 그이는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한들 그곳에 사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허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이는 다시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면 추해지기 마련일 것이고, 혹시 그녀가 죽어 영혼이 떠나버리면 그녀의 아름답던 몸도 지금 자신이 서있는 숲 언덕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릴 것이다.

그이는 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녀만큼은 절대 늙지도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병들고 늙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녀와 자신의 열정적인 사랑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물리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이는 웃었다. 어쩌면 자신이 참으로 속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이는 요르단 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반나절을 더 걸어 내려갔다.

요르단 강이 크게 굽이치면서 한쪽 편에 넓은 모래 둔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이와 유다가 세례공동체 마을을 만들려고 계획했던 곳이었다. 모래 둔덕 끝에 쌓다가 그만 둔 돌무지가 보였고 여기저기에 공사를 위해 표지로 박아놓은 나무 말뚝이 그대로 박혀있었다. 뒤쪽으로 병풍처럼 싸안은 숲 언덕은 여전히 아늑했다. 유다가 일행을 이끌고 이곳에 공사를 시작한지 사흘 만에 헤로데가 보낸 병사들의 급습을 받아 겨우 몸만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이는 병풍처럼 두른 숲 언덕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팔뚝만한 나뭇가지를 베어서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넝쿨들을 걷어와 지붕을 얹도록 이리저리 얽어맸다. 그리고 종려나무 잎을 몇 다발 베어 와서 위에 얹고 넝쿨로 얽어맸다. 뒷면과 옆면도 종려나무 잎을 세워 벽을 만들었다. 허리를 굽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보따리에서 시트를 꺼내어 가리개를 쳤다. 금방 아늑한 움막이 만들어 졌다.

움막을 만들면서도 내내 그녀의 생각뿐이었다. 이런 누추한 움막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그녀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녀와 함께 살 움막이라 생각하여 한 귀퉁이라도 허술하지 않게 공들여 지었다. 저쪽 숲 그늘에 앉은 그녀가 일하는 그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나무판을 다듬어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칼끝으로 파서 가리개 위에 매달아두었다.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모래둔덕을 둘러보았다. 유다가 무슨 생각으로 이 공동체 마을을 만들려고 했을까라는 의문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동료들과 이곳에 모여서 서로 알뜰하게 살아가는 것을 떠 올렸다. 그이는 그녀와 날마다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 겨우 먹고 살만큼만 일하고 아이들을 낳고 동료들과 어울려 기도하는 것을 상상 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들의 이 소박한 꿈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 한 쪽에선 그녀의 얼굴 때문에 설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가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무엇인가 생각의 끝을 완결해야 다음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데카폴리스를 지나면서 펠라에서 사온 말린 빵을 헤아려 보았다. 하루에 말린 빵 한조각과 물 한병이면 가을이 깊어지기 전까지 충분히 한 달은 버틸 것 같았다. 밤과 낮을 바꾸어 요한을 흉내 냈다. 오히려 낮엔 숲 언덕을 넘어 광야를 헤매고 밤에는 움막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새벽이슬을 털며 광야로 나가는 길은 상쾌했다. 가을햇빛이 쏟아지는 광야를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정오에 오면 길을 멈추고 품에서 말린 빵과 물을 꺼내어 먹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숲을 향해 걸었다.

밤에는 움막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때로는 하늘 높은 곳에 앉아서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눈에 가득 펼쳐지는가 싶으면 결국 그녀의 향기로운 살냄새가 그리워지면서 자신의 몸은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했다. 또 가끔은 아득하고 먼 땅 아래,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맨 끝 바닥에 앉아서 세상의 모든 것을 등에 진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목덜미를 물고 금방 땅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의 끝은 곧추서지 못한 채 상념이 되고 상념은 잡념이 되고 잡념은 결국 그녀의 맨살이 유혹하는 뜨거운 시간을 맴돌 뿐이었다.

<계속>

홍성담
/ 안토니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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