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코흘리개 만수는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금새 뚝 떨어질 것 같은 콧물이 아슬아슬하게 코 끝에서 곡예를 하다가도 훌쩍 한번 들여마시기만 하면 빛의 속도로 콧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묘기앞에서 우리는 만수의 콧물이 떨어질까봐 항상 조마조마하게 가슴 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수가 우리 모두의 친구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찹쌀 도너츠 덕분이었다.

만수 아버지의 도너츠 튀기는 솜씨는 시장통뿐 아니라 인근 읍내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가게 앞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갓 튀겨낸 바삭바삭하고 쫄깃쫄깃한 도너츠 껍질의 씹히는 식감이란! 특히 여늬 도너츠와 구별되는 탁월한 차별화의 비밀은 도너츠 껍질속에 숨어있었다. 속을 꽉 채운 달콤하고 구수한 팥속은 만수 아버지의 넉넉하고 후한 인심과 손맛이 어우러져 한 입 꽉 씹을 때 혀 끝에 스며드는 부드럽고 황홀한 느낌이야말로 우리에게 천상의 세계였다.

개구장이 우리들에겐 유일하고도 최고급의 간식이었기에 방과후면 만수를 앞세우고 떼거지로 몰려가 도너츠 가게를 터는 일은 꼬마들에게 즐거운 일탈이었다. 만수네 도너츠는 우리의 입만 즐겁게 해 준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 사정이 얇은 어른들에게는 단돈 천원 한 장이면 시장통에서 출출한 배를 달래고 운이 좋으면 만수네 아버지가 만수 엄마 몰래 밀가루 포대 사이에 꼬불쳐 놓은 막걸리까지 덤으로 걸치는 행운까지 얻으니 나랏님은 없어도 상관 없지만 만수네 가게만은 읍내에서 사라지면 안 될 유형문화재 였다. 하옇튼 우리는 만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수 아버지에게는 브이브이아이피였으니 순전히 만수 덕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만수가 아버지의 도너츠 가게를 물려받기로 한 것이다. 만수가 외아들이라는 것도 이유지만 코 흘리는 버릇 외에는 딱히 이렇다할 재주가 없는 아들을 둔 만수 아버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수의 콧물을 기억하는 우리들로선 도너츠 가게의 위생상태에 불안하지 않을수 없었다. 언젠가 우리의 2세들이 이용할 간식꺼리가 아닌가.

우리의 의심과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만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아버지 밑에서 수습 사원으로 취직했다. 우리의 염려와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만수는 승승장구 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만수는 열심히 도너츠를 빚고 튀겨냈다. 우리가 아는 학습지진아 코흘리개 만수가 아니었다. 만수는 도너츠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장통이 재개발되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만두집도 통닭집도 문을 닫고 떠나간 자리에 피자와 치킨과 햄버거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만수네 도너츠는 그 자리에서 가마솥을 건 채 건재했다.

만수네 도너츠에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큰 길 건너편 새 빌딩에 외국계 자본의 도너츠 프렌차이즈 가게가 오픈한 것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아메리칸식 도너츠였다. 가지각색의 모양에 화려하고 세련된 단장을 한 모양새가 아기자기한 도너츠들이 화려한 진열장에서 맵시를 뽐내는 폼은 도저히 울퉁불퉁하고 두리뭉실한 찹쌀 도너츠와는 비쥬얼에서 잽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도너츠와 어울린다는 아메리카식 커피까지 겸하고 있으니 기껏해야 음료수나 막걸리를 덤으로 내놓는 만수네의 촌스런 경영방식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드디어 거창한 개업식이 만수네 맞은편 가게에서 벌어졌다. 토끼 머리띠를 한 에스라인 행사전문 도우미 아가씨들의 간드러진 노래와 몸짓이 알록달록한 풍선더미속에 파묻힌 대형 도너츠 가게로 유혹을 했다. 5일장을 보러 나온 읍내 사람들의 발길이 이 신기한 광경을 놓칠새라 몰려 가고 있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박이라는 신화로 향했다.

“공룡의 발밑에 깔린 생쥐의 심정이었다”고 만수는 고백했다. 만수의 듬직한 가마솥은 만수와 함께 깊은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름에 찬 만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후 우리는 각자 사는데 바빠서 고향도 만수도 까맣게 잊었다. 만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해 11월 시국미사를 하러 국회의사당 전철역 3번출구를 막 나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명희야!”만수였다.

만수는 버텨냈다! 만수가 이겼다! 만수의 밑천은 돈도 학벌도 아니었다. 오직 ‘이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만수 가게는 도너츠만 파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의 가게앞에 걸린 큼직하고 시커먼 가마솥이 낳아주는 김이 무럭무럭하는 먹음직스런 찹쌀 도너츠와 찐빵앞에서 침을 흘리며 들어오는 모든 이가 만수네에게는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요 친구요 아버지요 아들이요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알았다. 도로 건너편 저 휘황찬란한 아메리카식 대형 도너츠 매장에서 기를 못 펴는 천원짜리 한 장 만으로 만수네 도너츠 가게에서는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대접을 받는지 ..... 공룡이 죽고 생쥐가 이겼다. 생쥐의 성공의 비밀은 이웃과의 따뜻한 ‘연대’였다.

만수는 사대강 시국미사를 마치고 막차를 타야 한다며 서둘러서 고속버스터미널로 떠났다. 내일 장날이니 가게문을 일찍 열어야 한다며... 며칠후 만수는 콧물 아니 눈물 묻은 도너츠 30개를 택배로 보내주었다. 던킨보다 휠씬 맛나는.

심명희/ 마리아.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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