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1984년 그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 때문에 바티칸으로 소환당했다. 바티칸은 내내 해방신학과 중남미 교회가 기존 교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판단해 왔다. 신앙교리성 장관과 그가 나눈 대화다.

“수단이 썩 잘 어울리는군요. 신부님. 그건 당신이 누구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주죠.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더위 때문에 이 옷을 입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의 헌신과 인내를 알아보지요. 그들은 그가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있구나 하고 말 할 겁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영성주의의 증거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단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잘 차려 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어떤 것들은 눈에 보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단은 권력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의 종이어야만 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은 그 수단을 아예 벗어버려야 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20년 후 교황직에 올랐다. 전자는 레오나르도 보프다. 그는 이제 ‘신부’로 불리지 않는다. 1992년 6월 28일, 보프 신부는 <해방 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의 사제직 사임과 소속 수도회인 프란시스코회의 탈퇴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보프 신부는 그동안 “교황청 당국이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자신을 가톨릭 공식 신학 노선에 묶어 두기 위해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그는 자신의 믿음은 물론 우리를 일치시키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마저 흔들릴 지경에 이르렀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동안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걸어갔던 여정을 마저 걷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사제-수도자 진지’에서 ‘평신도 진지’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사제직을 떠나지만 교회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프란시스코회를 떠나지만 프란시스코 성인의 자애롭고 형제애적 꿈을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교황청의 해방신학 파괴 전략

결국 교황청의 반(反)해방신학 전략이 보프의 사제직 사임 결정을 낳게 한 원인이었다. 교황청은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내리쳤다. 보수적인 주교를 임명하거나 진보적 성향의 신학교를 감독 또는 폐쇄하고, 컴퓨터 전산망을 통해 해방신학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해방신학을 공격해 왔다. 최근 혼 소브리노의 그리스도론을 문제삼은 것도 마찬가지며, 지금도 그 노선은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황청은 1989년에 해방신학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 중의 한 사람인 파울로 아른스 추기경 관할의 상파울로 대교구를 다섯조각으로 나누어 그 중 시내 상권 중심지로 아른스 추기경 관할을 제한하고, 민중사목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시 변두리 지역에 네 개의 새로 마련된 교구에 보수적인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고 돔 헬더 까마라 주교로 유명한 해방신학의 거점 중의 하나인 헤시삐-올린다 교구의 신학교 두 곳을 폐쇄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권력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를 지지했던 보프에게 가해진 교황청 당국의 압력이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1971년 이후 교황청 당국은 수시로 서한, 경고, 심문, 검열, 재판, 제한조치, 처벌에 이르기까지 각종 압력을 보프 신부에게 가했으며, 1984년에는 로마에 소환되어 바티칸 고위 교리 당국자의 심문을 받았고 1985년에는 ‘침묵’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 신학적으로 앞서기보다는 교회와 함께 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보프는 <보제스출판사>의 편집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모든 저작물은 프란시스코회 내부 검열과 출판허가(imprimatur)를 내주는 주교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교회(바티칸)에 대한 그의 소감을 들어보자. “이 20년 동안 교리 당국 언저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교리 당국이 너무나 잔인하고 무자비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결코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조그만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며 모든 걸 빠뜨림 없이 접수한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갖고 자신의 목표, 즉 신학지성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두기 위한 수단을 마련한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가난한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순명

그는 가난한 이들의 삶과 해방운동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자기 신원을 발견해 왔다. 이 거룩한 길을 마저 걷기 위해서 그는 사제직을 버리고 수도회를 떠나야 했다. 그는 “교계만이 복음적 가치를 독점할 수 없고 프란시스코회만이 아시시의 태양, 프란시스코 성인 정신의 유일한 계승자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사제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평신도 신분으로 격하되는 게 아니라 평신도 신분으로 ‘격상’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 역시 유대교 사회에서 평신도였지 않은가. 이는 주교에게 순명을 서약하기보다 하느님과 가난한 하느님 백성들에게 순명하겠다는 표지였다.

당시 보프 신부는 자신의 태도가 교회 분열을 제공할 위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걱정한 것은 교회 안에서 빚어진 ‘영혼의 분열’이었다. 가톨릭교회의 가장 심각한 영적 복음적 위기는 권력과 카리스마의 갈등이다. 보수적인 그룹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선포한 ‘하느님 백성인 교회’라는 개념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오히려 교계제도인 교회를 강화하며, 교회법과 규율의 힘으로 순종과 굴복을 요구하는 일사분란한 질서를 찾아가는 ‘권력’의 길을 찾아갔던 것이다. 즉, 요한 23세 교황이 공의회를 선포한 뒤로 ‘잃어버린 십 수년’의 권력을 되찾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다른 그룹은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에 의지하여 교회를 제도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민중 속에 살아 움직이는 ‘아래부터 탄생하는 은총의 길’을 갈망했다.

보프는 이러한 세상과 교회의 해방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교회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교회제도로부터 이탈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더 이상 교회를 포근한 가정으로 느끼지 않고 ‘일종의 하숙집’으로 느끼고 있으며, 복음적 체험 없이 신앙과 일 때문에 억지로 남아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편 보프 신부는 교계의 권위주의를 삼위일체 교리와 어긋난다고 말한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계층이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인 세 분 하느님은 서로 종속되지 않으며 존엄성과 선의에서 동등한 한 분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의 차별을 만드는 교계제도가 신적 제도라고 말하는 것야말로 ‘이단’이라는 것이다. 보프 신부는 교회 안에 아버지와 스승이라고 부르게 하는 제도와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아버지요 스승은 오로지 한 분 하느님 뿐이라던 예수의 평등한 자매형제적 공동체를 향한 꿈을 되찾을 길이 없다고 선포한다. 교회는 성직과 수도직의 직제에 두루 아버지와 스승의 호칭을 즐겨 사용하며(신부/아빠스), 그 이름이 주는 권력을 항유해 왔다.

기적은 바티칸보다 리우의 판자촌에서

보프는 1938년 12월14일 브라질 산타카타리나주 콘코르디아에서 태어났다. 브라질페트로폴리스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34살 때 독일 뮌헨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과 정치적 소외로 고통받는 현실을 경험하며 <해방신학>의 저자인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우루과이의 후안루이스 세군도 등과 함께 남미 해방신학운동에 투신했다. 보프는 현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며 남미의 대표적 해방신학자들인 동생 클로드비스, 프레이 베토, 파블로 리차드, 프란츠 힌켈암메르트 등과 함께 `새로운 상황에서의 해방신학'의 미래를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를 두고두고 심판해 왔던 바티칸의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이 2005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이 베네딕트 16세에게 보프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교황을 희망하며, 바티칸보다는 리우의 판자촌에서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바란다.” “불행하게도 나는 교황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않으며 다만 교황이 지난 25년간 해방신학을 억압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더 이상 보이지 않기만을 바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08-07-23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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