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윤대엽]

일본이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위태로운 한국 개신교회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씨-나는 그의 목사로서의 자격을 박탈했다-는 일본 지진발생 직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대지진을 ‘하나님을 멀리하고 무신론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15일, 2박 3일 일정으로 동경으로 출국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그럼 안전(!)하리라'고 외치고 있을 그의 모습이 훤하다. 재난의 공포를 신앙과 결부시키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두려움과 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되는데, 무지해도 상관없는, 아니 무지할수록 좋은 신앙과는 극과 극이 통하는 관계인 것이다. 흑사병이 유럽 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던 16세기 교회는 그렇게 대사부를 팔아 챙겼다. 그리고 교회는 신앙을 이유로 전쟁과 살인을 일삼는 모순을 일삼았다. 종교에 의해 자행된 모순의 유산은 미국과 중동, 유럽,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서 현재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어 다원적 종교의 공존을 이루어낸 것은 근대적 합리와 이성 덕분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는 거꾸로 중세로 회귀하는 것 같다. 이슬람 채권법 제정을 둘러싸고 일부 교단은 정권퇴진 운동을 불사하겠다며 반대를 표명했다. 그 대표인사가 조용기 씨다. 장로 대통령은 기독교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MB 정부 출범 이후 불교계와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가 종교에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참으로 무책임한 행위일 뿐이다.

교회의 성장은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인권을 주창하고 독재에 맞섰으며 빈곤을 치유한 것은 정치보다 강한 교회였다. 그러나 최근 자기 정화작용을 상실한 교회가 오히려 갈등과 분쟁의 주체가 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슬람 국가에서까지 무리한 선교활동으로 국제적 문제를 일으킨 한국교회가 정작 이슬람 채권법을 반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재난을 신앙의 문제로 결부시키는 오만은 중세교회의 면죄부에 불과하다. 일본 사태에 관해서 '하느님의 일'임을 언급하면서도 선교사의 무사를 기도하는 교회의 이기심 역시 모순일 뿐이다. 종교개혁도 바로 이런 교회의 모순을 기원으로 하지 않았던가? 자기모순에 빠진 한국 교회는 무지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일본의 재난 이후 많은 신자들은 신앙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신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동정과 애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을 강요하기에 앞서 조건 없는 사랑이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종교적 가치를 위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평화와 조화의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자 교회가 정치보다 강해지는 길이다.

윤대엽 / 미카엘. 연세대 정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게이오 대학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현재는 대만 국립정치대학 국제관계연구소 방문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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