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의 징역 182년

나는 일본에 사상 최대의 거대지진이 일어나고 10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일본의 해안선을 바꾸어 놓은 직후인 2011년 3월 11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서 오사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석태, 심재환, 이상희, 장경욱, 조영선 등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재심 변호인단’ 다섯 명과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 그리고 나는 “아직 일본으로 출발하지 않았다면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오라”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연락을 연속으로 받으면서도 오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예정지인 오사카가 지진이 일어난 동북지역과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 평온하다는 오사카 분들의 연락이 우리를 어느 정도 안심하게 했고, 기왕 한 달 전부터 어렵게 맞춘 일정인데다가 오사카에서 기다리고 계실 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 3월 10일 오사카에서 열린 기자회견(사진/김덕진)

재일 자이니치 한국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또는 재일(자이니치在日)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일본 속의 한국인들,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지만, 겨우 ‘영주자격’을 가진 한국 국적의 사람들이다. 자이니치(在日)라는 말은 ‘일본에 있는’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재일한국인’을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이 자이니치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중일전쟁 이후 극심해진 강제노역으로 일본에 끌려왔다. 이들이 일본에 도착한 순간부터 온갖 차별과 억압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923년 20만 명이 가까운 인명피해가 있었던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나서 재일한국인들이 폭동과 약탈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학살이 일어나 6,000명이 죽임을 당한 것은 당시 재일한국인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해방 전, 200만 명이 넘었던 재일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140여만 명이 한국으로 귀환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60여만 명이 일본에 남았다. 1952년 57만 명, 1974년 63만 명, 1992년 71만 명, 2009년 91만 명으로 일본에 영주하는 한국인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이 중 32만 명은 일본으로 귀화한 것으로 외교통상부는 파악하고 있다.  

차별과 멸시에 노출된 재일 한국인‥남한도 북한 아닌 한반도만 바라보고 살아와

잘 알려진 것처럼 재일한국인들은 진학이나 취업 등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았고 지문날인을 강요받았고, 공무원 채용 등에서도 불이익이 뒤따랐다. 재일한국인 사회는 친남한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친북한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나뉘어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일본인들로부터 받아 온 극심한 차별은 2세, 3세들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귀화’하여 일본국적을 취득한다고 해서 각종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재일한국인들은 영화 ‘우리학교’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내 ‘민족학교’들과 ‘조선대학’ 등을 일본 정부의 지원 없이 구성원들의 갹출로 운영해 왔다. 오랜 시간 북한 정부의 지원을 받아왔지만,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민족학교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치마저고리가 교복이었던 민족학교의 여학생들이 일본 우익들의 테러 대상이 되어 위험해 처하는 일도 발생하였고, 민족학교와 조선대학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주자격의 제한으로 출국 시 입국기한을 지정받아 기한 내 귀국해야 하는 등 2011년에도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의 한 장면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며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국 한반도를 바라보며 살아온 재일한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아무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 씻을 수 없는 죄가 바로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들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1975년경부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때인 1985년까지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고문과 날조로 조작한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의 수는 120여 명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거주자들, 표류어부 사건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3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우리는 이들 중 20명을 3박 4일간 오사카에서 만났다. 그들이 수십 년 동안 가슴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한과 눈물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으로 감방에서 보낸 182년 또는 2000년 

우리가 만난 20명의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잔혹한 고문과 수십 일의 불법구금, 온갖 비인간적인 협박과 회유를 받으며, 공안당국이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를 택해 간첩이 되어야 했던 이들. 단 20명의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이 서대문형무소, 광주교도소, 대전교도소, 안동교도소 등 그 악명 높은 십오 척 담장 아래 감방에서 전향공작과 고문에 절은 몸과 마음으로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외로움, 억울함과 그리움을 견디며 지낸 세월의 합이 182년이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80여 명의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과 남한에 사는 재일동포 ‘관련’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200여 명의 징역을 합치면 어림잡아 2,000년이 넘는다. 이 엄청난 세월의 시름은 과연 누구의 탓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박정희는 죽었고, 전두환은 재산이 29만 원밖에 남지 않았으니 사죄할 사람도 없고 보상할 사람도 없는가? 우리의 오사카 일정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등의 혐의로 복역한 장기수들 대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남파된 간첩들이었다. 1975년 한옥신이 쓴 <사상범죄론>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67년까지 체포, 자수, 사살된 간첩의 수가 1,429명이고 이 중 1,368명이 남파간첩이었다. 1960년대 말 이후에는 남파간첩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는 사실상 간첩의 남파가 중단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간첩은 계속 필요했고 북에서 보내는 간첩이 줄어들자 조작간첩사건의 생산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반대하며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을 수없이 간첩으로 만들었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잡아들이는 사람은 많아졌다. 그 유명한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남민전사건 등이 모두 이때 조작되어 최근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들이다. 

기존의 법으로 잡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고는 긴급조치 1호, 4호, 9호 등 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법을 만들어 또 잡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였다. 이렇게 남한에서의 대규모 조작간첩사건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 소위 재일동포 간첩 사건들이 본격적으로 조작되기 시작된다.

국가권력에 의한 조작간첩사건, 유독 재일한국민 관련 사건만 관심 없어

바로 전날 일어난 거대지진과 쓰나미로 일본은 물론 세계의 언론과 시선이 일본 동북지역과 후쿠시마 원전으로 향해있던 3월 12일 오사카시 기타구에 위치한 ‘오사카변호사회관’에서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재심 변호인단 방문 기자회견이 열렸다. 조작간첩사건으로 고문과 복역을 경험한 재일한국인들과 재일한국인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일본 변호사들, 일본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자리했다. 지진 때문에 취재진이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많은 일본의 언론이 관심을 두고 취재에 참여했다.  

▲ 피해자 이철 씨
수많은 조작간첩사건으로 복역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을 불러 모아 20여 년 동안 ‘재일한국인 양심수 동우회’를 이끌어 왔던 이철(63세) 씨는 한국 유학시절 결혼을 약속한 당시 애인이자 현재의 부인인 민향숙(60세) 씨와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사형을 선고받고 14년을 복역했다.

그는 그동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재심을 청구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는 조작간첩사건들의 해결은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국가권력이 스스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밝힌 후,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구구절절 당시의 고문과 조작을 설명하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도 않고, 억울하다고 눈물 흘리며 쳐다보아 주지도 않는 한국 사회에 호소하고 싶지도 않다 했다.

죽을 때까지는 잊고 살 수도 없고, 시간이 흐른다고 화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옳은 말이다. 대한민국이 오랜 시간 외면해 왔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다. 남한에 있는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은 그래도 상당수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인받고 정당한 배상을 받아 왔는데 유독 재일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누구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송구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이들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한국을 오가며 재심을 통해 밝혀내는 것 외에는 기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들에게 새로운 아픔일 수 있다는 것에 나도 아프다.  

서른 살 청년의 무모했지만 순수했던 열정‥보안사로

▲ 피해자 유영수 씨
오사카에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는 유영수(66세) 씨도 재심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주 단호했다. 위에서 이철 씨가 말한 이유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더 긴 시간 복역한 사람들, 더 억울하고 더 비참하게 고문당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이 재심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전에 자신이 재심을 청구하는 것은 그분들에게 면목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 화학과 대학원 유학시절 그는, 유신정권이 민청학련사건, 김대중납치사건 등을 조작하고 긴급조치를 발표하는 등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와 통일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마음 아팠다. 유학 2년이 지났을 무렵인 1977년, 더 이상 가만히만 있을 수가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그 친구의 숙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육군준장으로 육군포병학교 교장이었던 친구의 숙부에게 유영수 씨는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암울한 남한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4·19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한다. 북한군의 고위 장성들과 협의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 달라”.

서른 살 청년의 무모했지만 순수했던 열정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보안사에 연행되어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된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이송되어 오고 나서 끊임없이 배후를 물으며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수십일 동안 가했다. 남산의 고문기술자들은 한양대 의대로 유학을 온 친동생 유성삼(57세) 씨의 하숙방을 수색하던 중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한 장 발견하고 동생의 친구들을 유영수 씨와 한데 묶어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동생 유성삼 씨를 유영수 씨의 옆방에 가두고 고문하며 유영수 씨가 동생의 비명과 흐느끼는 소리를 한나절이 넘게 듣게 하고는 유영수 씨에게 준비된 시나리오 서너 개를 제시했다. 이미 동생이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잡혀와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유영수 씨는 고문기술자가 제시한 시나리오 중 하나를 택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 형 유영수 씨는 20년을, 동생 유성삼 씨는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과 불법구금의 두 달이 지난 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가족들과 면회를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부모님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억울하게 옥에 갇힌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두 부부는 일본말로 접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교도소 측의 방침 때문에 몇 달 동안 아들을 면회하지 못하고 서대문형무소 앞만 오갔다. 그러던 중 유영수 씨는 맞춤법도 다 틀리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는 한통의 접견서신을 받아보게 된다. 접견서신이란 접견을 하러 왔다가 접견을 하지 못하거나, 접견 시 빠뜨린 말을 전하기 위해 교도소 등의 민원실에서 작성하여 전달하는 편지다. 아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예순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 짧은 안부 인사를 적었던 것이다. 유영수 씨는 이 대목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면담 하던 변호사도, 곁에 있던 필자도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3월 13일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작간첩사건 관련 보고회(사진/김덕진)

고국에서 날아온 벗들 덕분에 재심 청구하기로

이철 씨와 유영수 씨는 우리들의 방문 말미에 재심을 청구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20여 년간, 차별과 억압의 땅 일본에서 그나마 힘들게 가꾸고 유지해 온 평화로운 일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불안함, 잊고만 싶은 고문과 구금의 시절을 다시 불어와야 한다는 공포, 대한민국이 과연 진실을 밝혀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강한 불신이 여전히 그들을 머뭇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옆방에서 고문을 받고 같은 하늘 아래서 옥고를 치루고, 이십 년 넘게 동우회를 꾸리며 삶을 공유하던 동지들과 함께 재심을 청구한다는 사실과 오사카까지 직접 날아와 자신들을 변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는 바다 건너 변호사들의 진심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오사카의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의 꽁꽁 얼었던 마음에도 봄이 왔다.  

오랜 세월 과거를 잊기 위해, 애써 모른 척하고 살아왔던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재심 청구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동경 릿쿄대학의 이령경과 진실위 전 조사관 김영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령경은 한국에서 과거사청산 관련 활동을 하던 중 일본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유학 생활이 한창이던 2006년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을 만나며 이들의 든든한 벗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이령경은 재일양심수 동우회 회원들을 차례로 인터뷰하며 이들을 대신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을 모았고, 재심을 위해 한국의 변호사 사무실을 오가며 필요한 절차들을 준비했다. 그녀는 이름만 대면 그 사건 내용은 물론 현재 그분들의 상황까지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녀가 모은 기록이 없었다면, 그녀가 한 분, 한 분을 살뜰히 챙기며 설득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재심은 지금보다 더 가시밭길을 걸었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김영진은 진실위 조사관으로 일하던 중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담당하게 된 후, 사건 조사를 위해 관련자들을 수소문하며 몇 차례 일본을 다녀왔다. 조사가 순조롭지 않았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20년 넘게 이들을 외면해 온 한국정부가 갑자기 이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섰을 때, 아무도 쉽게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과거사청산을 위해 애 써온 진실위가 막판에 엉터리 위원장과 위원들을 만나 엉망으로 활동을 종료하게 되었을 때, 김영진은 이들을 만나 재심을 권유했다. 자신이 조사관 시절 수집한 기록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재심을 하도록 안내하고 설득했다.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진실위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재심으로라도 풀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재심 청구를 결정한 이들이 한목소리로 김영진이 끈질기게 찾아와 설득하지 않았다면 결심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눈물 많은 변호사가 시작한 재심 변호인단

▲ 이석태 변호사
마지막으로 짧은 시간 동안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재심변호인단을 꾸려낸 이석태 변호사의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권대사를 지냈고 민변 회장을 역임한 이석태 변호사는 한국사회의 크고 작은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곁에서 함께 했던 민변의 중견 변호사들로 변호인단을 구성해 냈다. 참여한 변호사 한 명, 한 명의 면면히 실로 대단하다. 이들 모두 이석태 변호사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신속하고 진지하게 변호인단이 구성되고 오사카까지 날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석태 변호사는 뛰어난 변호사이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훌륭한 상담자이기도 했다. 그는 면담 중 상대방이 조금 길게 불필요한 말을 하더라도 단 한 번 중간에 말을 끊는 법이 없었다. 두 시간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물론 이 변호사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마음이 열리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신뢰가 쌓인다. 눈물 흘리는 변호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120여 명으로 추정되는 재일한국인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중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사람은 아직 이종수 씨 단 한 명 뿐이다.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인 이들이 4명, 재심을 청구하고 재심개시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8명이다. 이번 오사카 방문 중에 추가로 7~8명이 재심청구를 결정했지만,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는 이들도 있고,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많다. 재심을 위한 변호인단의 활동도 이제 막 출발 한 셈이고, 한국의 인권단체들도 이 문제를 위해 나서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이철, 강종건, 이헌치, 조상록, 구말모, 고병택, 김오자, 서승, 윤종헌, 박영식, 조득훈, 강종헌, 박박, 유영수, 이동석, 허경조, 김원중, 김동휘, 김정사, 이종수 등 우리가 만난 20명의 재일한국인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 왔던 우리 역사이자 상처다. 모른 척한다고 없어지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부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 피해를 배상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었던 역사의 피해자들에게 우리 모두 사죄해야 한다. 치유해야 할 상처는 그들과 우리 모두의 상처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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