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

한국교회의 상업화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쓰기 시작했던 글을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 글은 나중에 <가톨릭근본주의의 도전>이란 소책자로 펴냈다. 그러나 한정본 출판으로 품절되고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교회상황도 변화가 생겨서,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다듬어 오늘 우리 교회의 상황을 해결해 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 연재와 관련해 '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붙였다. 우리 교회를 좀더 객관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는 것이다. 맹목적 사랑에 눈 멀고 귀 멀고 나면 사위를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    

오늘 아침은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었다. 아마도 며칠 동안 맑고 따뜻했으니, 좀 춥고 흐린 날도 있으려니, 생각하라는 사순절 예감인 모양이다. 어쩌면 내일 새벽쯤 한바탕 비도 오려나. 자연은 무심한 듯 하면서도 때가 되면 자비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내 먹구름을 데려오기도 한다.

머물러 있는 구름이 없듯이, 주저앉아 있는 계절도 없다. 흐른다. 막혀있는 것은 죽은 것들뿐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출구를 두고 입구를 막으며, 들어오는 게 있으면 나가는 것이 있다. 그걸 우린 신진대사(新陳代謝)라고 한다. 건강한 세포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래서 사람은 늘 새로운 육신을 가진다. 흐리면 개일 날이 있음을 알려주는 듯이, 흐린 구름장 사이로 언뜻 말간 달이 낯을 디민다. 묘한 아름다움이다.

지난 10년동안 서울을 떠난 뒤로 ‘교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접고 살았었는데,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교회'를 다시 묵상한다. 교회가 묵상의 대상이라니, 쩝. 그동안 교회에 대한 애정도 많이 줄어들었는데, 교회를 묵상한다고 그 애정이 다시 살아날까, 기대해 본다. 하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쓴 오강남 교수는 전제를 달았다. '우리가 생각없이 예전에 믿었던 그런 예수는 없다'는 뜻이라고 사족을 다는 것이다. 그처럼 나 역시 '종교가 권력이 되는, 예전에 생각없이 어머니로 믿어왔던 그런 교회'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는 뜻으로 다시 새긴다.  

▲ 지난 겨울 명동성당 앞 예수상에 눈이 내려 앉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예수상을 두고 나는 '바보 예수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예수의 표정도 그러하거니와, 명동성당처럼 민주화와 종교권력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미지가 겹쳐서 나타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곳 명동에 서 계시려면 반쯤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 앉으면 어깨가 추위에 오그라들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포근해질 것 같은 착각도 들기 때문이다. (사진/한상봉 기자)

머리에 철이 들고 나서, '교회 문제'는 항상 숙제처럼 따라다녔다. 예전에도 교회는 마땅히 변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는데, 벌써 수십여년이나 지난 이야기이지만, 일부 청년들 사이에선 교회가 쇄신의 대상인가, 아니면 변혁의 대상인가를 두고 한참이나 논쟁했던 기억이 난다.

1990년대의 한국교회를 두고, 평신도신학을 하자고 처음 나섰던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 회원들은 ‘교회의 민족민주적 변혁’을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는 더 민중적이어야 하고, 더 민족적이어야 하며, 더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며, 민족통일을 비롯하여 겨레가 당면한 과제에 함께 동참하려는 의지를 가진 토착화된 교회이어야 하며, 성직자-수도자-평신도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적 장벽을 뛰어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 구조를 가진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종교인들과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교회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요구들은 교회 제도권 안에서 항상 소수의 의견에 그쳤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들 가운데는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이 대체로 공감하였고, 평신도 단체들의 경우에는 제도권의 냉소적 태도를 보면서, 따로 우리끼리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도 심심파적으로 나오곤 하였다. 물론 현실화된 적은 없었지만.

2천년대를 사는 우리 교회는 형식적인 차원에서 볼 때, 교회의 민주화나 토착화는 어느 정도 이뤄진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부분은 점점 퇴조하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교회의 중산층화’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지만, 서울, 수원 등 거대교구를 중심으로 볼 때는 그 이상의 계층을 위한 종교적 서비스 기관으로 전락한 느낌마저 주는 게 현실이다.

이는 단순히 복지시설이나 자선을 위한 기금의 절대 액수의 증가 또는 감소에 대한 평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성원들이, 특히 지도자들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의 시각에서 교회와 그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중적 시각이 빠져 있다면, 당연히 통일사목의 방향 역시 교회의 팽창이라는 호교론적 시각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으며, 교회 민주화라는 측면 역시 유력한 평신도의 권력장악과 다른 말이 아니다. 여기서 ‘유력한’ 평신도란 당연히 사회적 권력이나 재산에 비례하는 것이다. 교회가 일종의 종교적 이익집단이 되어 갈 때, 이른바 부자와 교회권력은 공생관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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