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눈으로 역사적 예수 읽기-4]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저작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예수 새로 보기>(원제 Jesus : A New Version, 1987)의 요지를 추리면서 오늘날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간단하게 정리해본 글 중 하나이다. -필자

지난 번에도 보았지만, 성경에는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나온다.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과 같은 것들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보다는 치유 이야기 속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이다.

성경에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제자들을 보내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물론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기적을 많이 행했지만, 여기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저 오늘날 의사가 하는 기술적인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는 병자들을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돌려주고, 진정한 의미의 생명을 회복시켜주었다는 측면이 더 크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전조라는 것을 예수는 늘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라는 질문 속에는 하느님의 사자(메시아)가 와서 세상의 불평등을 치유하리라는 기대, 즉 당시의 종말론이 담겨있다. 그런데 예수의 행적을 보니 ‘지금이 바로 그 새로운 시대가 아닐까’, 그리고 ‘예수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일러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마태 11,4-6) 예수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찼다는 뜻이고(97),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분이라고 간주했다는 뜻이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예수가 정말 그러한 치유 기적을 행했는지 일일이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을 밝히기는 불가능할 때도 많다. 중요한 것은 첫째, 예수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예수에게 부여된 그 카리스마를 사람들은 영(Spirit)이라고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100) 둘째, 예수의 온갖 기적 이야기를 신문보도처럼 대하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전해준 이들에게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가 더욱 중요하며(98, 102), 셋째, 기적 이야기들은 그저 이야기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의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100)

가령 예수가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에는 예수가 하느님의 권능을 공유하며 악을 정복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바다(히브리어 ‘얌’)의 히브리어적 어원이 악신에서 유래했다는 사실과, 장차 바다에서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거대한 짐승들이 솟아나올 것이라고 상상된 데서(다니엘 7,3; 묵시 13,1) 추측할 수 있다.(103-104) 그리고 예수가 죽은 나자로를 살린 이야기에는 이제 새 시대가 도래했으며, 예수가 그 주인공이라는 뜻이 담겨있다.(105)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 상징의 힘이 오랜 세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줄곧 경험되어 왔기 때문이다.(105) 그만한 진실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성경을 과학서나 사실서로서보다는 신앙서로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낳은 사람들의 마음과 신앙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총체적 국난의 상황 속에서, 목숨조차 위태로운 시대에서 끝없는 희망을 찾았다. 그 희망이란 단순히 개인적 욕망 충족의 수준만이 아닌, 정말 멋진 사회의 도래에 대한 기대였다. 그들은 눈먼 자가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시대를 꿈꾸었다. 이미 말라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예루살렘이 다시 꽃피게 될 때를 꿈꾸면서, 목숨조차 위태로워 두려워 떠는 상황에서도 힘과 용기의 원천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이러한 용기와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운동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일상 속에 파묻히고, 사태의 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한 채, 관습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지만, 일부는 예수에게서 희망의 시대를 읽어냈고, 그만큼 그를 신적 차원으로까지 높이게 되었다. 이것은 오류나 오만이라기보다는, 예수에게서 얻은 힘의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초기 교회는 예수가 생명의 기운으로 성도들을 위험과 악에서 구해주며, 광야에서 먹여주고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분이라고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107)

* ( )속 숫자는 마커스 보그, <예수새로보기> 김기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의 쪽수입니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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