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한상욱]

“너희는 이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마태 21,13)

월요일 아침이면 군산에서 상경하는 신부님의 메시지를 받는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다. ‘죽어야 산다’는 비장함이 너무 무겁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고 누구나 한번은 태어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면 죽는 것 역시 살아가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일뿐 다만 어떠한 죽음이고 생인지만 남을 뿐이다. 명동의 오후는 따사롭다. 겨울이 지나면 봄은 반드시 온다. 자연의 이치나 세상의 이치나 다를바 없다.

세상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봄을 갈구한다.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는 겨울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느껴지는 햇볕의 따뜻함은 혹독한 겨울을 느낀 사람만이 고마움을 알 수 있다. 햇볕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쳐준다. 햇볕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햇볕은 혼자서 독점할 수 가 없다. 참 다행이다.

어느 사이에 봄을 알리는 따뜻한 햇살이 성모동산에 살포시 내려와 앉은 오후, 신부님의 서각소리도 가벼워진다. 날씨가 풀리고 성모동산에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벤취 한켠에 걸려있는 서각전시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목판에 새겨진 성서구절을 읽고 간다. 젊은 남녀들도, 노인들도 한번씩 들여다 보고 지나간다.

오늘은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마태 21: 13)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의 탁자를 엎어버리고 강도를 꾸짖었다. 사람보다 재물을 섬기고 사는 성전과 그러한 성전에서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권력과 제도에 대한 무서운 경고였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의 시기와 질투, 돌멩이 같은 마음을 바꾸기 위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듣는 이는 별로 없다. 시대는 바뀌어도 그 말의 의미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 생생하게 들릴뿐이다.

‘강도의 소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강도’에 대한 해석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아마도 명동성당의 신자인듯한 한분이 서각 앞에서 한참 있다가 하는 말씀이었다. ‘그럼 명동성당에 오는 노동자들이 바로 강도들이지, 남의 집에 막 들어오는데 그게 강도 아냐’ 조롱인지 진짜 그런 마음인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 사람들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게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명동성당에서 문 신부님이 보낸 하루하루가 벌써 반년이 넘어간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지나 이제 봄이 오는 길목에 있으니 말이다. 신부님의 하루하루는 우리들에게 교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성찰의 소중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늘의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누구와 있는지, 그리고 누구인지를 묻고 또 묻는 시간이었고 알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혀 오른다."(호세 11,8)

한상욱 /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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