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눈으로 역사적 예수 읽기-3]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저작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예수 새로 보기>(원제 Jesus : A New Version, 1987)의 요지를 추리면서 오늘날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간단하게 정리해본 글 중 하나이다. -필자

성서에는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인조차 그런 기적이 실제 있었는지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각종 기적을 문자 그대로 믿고 예수야말로 신이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예수는 실제로 놀랄만한 기적들을 행했던 것일까?

그런 적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성경에는 예수가 귀신축출 내지 병자치유 기적을 많이 행했던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그러한 치유가 당시인들에게 새롭기만 한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병을 고치는 예언자나 마술사는 비교적 흔했기 때문이다.(89)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기적에 담긴 ‘의미’이다.

예수 시대 사람들은 하늘을 천정처럼 생각했고, 그 하늘의 기운을 받았다고 믿어지는 카리스마적 인물들을 추종했다. 하늘로부터 영이 내려온다고 믿었고, 그렇지 못한 악한 영이 공간을 배회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일부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으면 실제로 그에 어울리는 일이 벌어지는 경향도 있다.(94-95) 일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어울리게 벌어지곤 한다. 다른 설명이 좀 더 필요하겠으나, 사람들의 생각 내지 의식은 물질적 현상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는 병자치유 기적 같은 것이 많았는데 요사이는 왜 그런 일이 적을까? 물론 요즘도 그런 기적은 종종 벌어진다. 그렇지만 주로 병원에서 벌어진다. 사람들이 의료 기술과 약물의 힘을 믿는 한, 그런 기적은 주로 병원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사람들이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적 자체보다는 기적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 체험 이후에, 역사적 예수보다는 초월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 안목으로 그 글을 읽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글이다.(85) 가령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조상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살 때 하느님이 신비스러운 음식(만나)으로 조상들을 먹이신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고, 성경은 그런 독자를 염두에 두고서, 예수가 이스라엘을 세운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은연중 말하려는 의도로 쓰인 것이다.(86)

뿐만 아니라,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는 성서 작성 이전 초기 교회의 성만찬 행위와도 연결된다. 초기 교회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유언처럼 받아들이고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례를 행했다. 그 과정에 실제로 찢기고 쏟아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생각하면서, 그 빵을 모세 시대 ‘만나’와 같은 것으로서 간주했고, 예수를 ‘생명의 빵’(요한 6:33,35,48)이라 표현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기적 이야기에는 상당부분 상징성이 있다. 여기서 상징이란 단순히 비실제적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언어나 내용이 그 자체를 넘어서 여러 가지 의미나 연상의 망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다. 연상하면서 이야기들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87)

예수의 병자치유 내지 귀신축출 이야기에는 사회적 의미도 들어있다. 가령 마르 5,2-9에는 무덤가에 살면서 힘센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은 부정하고 불결한 이미지로 가득한 사람이다. 예수가 그에게서 귀신을 쫒아내고는 마지막으로 한 말이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병자를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시킨 것을 의미한다.(92)

당시 병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따라서 정결해질 수 없었으며,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는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 역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오늘날 병원에서 단순히 병을 치료해준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명색이 신자인데, 명색이 사제인데, 왜 나는 예수처럼 남의 병을 치유해주지 못할까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병은 대체로 병원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가 병으로 시달릴 때, 누군가 힘든 문제로 고생할 때, 그로 인한 심리적 고독과 소외를 이기도록 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예수가 행한 ‘기적의 사회학’이기 때문이다.

* ( )속 숫자는 마커스 보그, <예수새로보기> 김기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의 쪽수입니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