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안동교구)

청량산 자락, 정호경 신부를 찾아갔다. 노신부가 혼자 사는 게 염려되어서일까, 자식처럼 아우처럼 이 집에 들르곤 하던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와 함께 찾아간 길이었는데, 정호경 신부는 상주 가르멜수녀원에서 지내는 신대원 신부에게 고해신부처럼, 때로는 선배 농사꾼으로 조언해주고 다독거려 주는 폼이 참 정겨워 보였다. 일종의 멘토라고 할까? 매실장아찌 담그는 법이라든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하며 구순하게 자근자근 일러주었다.
 


예전에 <비나리 달이네 집>이라는 동화책을 읽었던 터라, 그 그림을 떠올리며 퍼즐을 맞추듯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적당히 물러앉은 청량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어째 마을이름도 ‘비나리’였다. 묵상하기 좋은 땅이란 뜻일까? 정호경 신부는 이천 평이나 되는 땅에서 벼농사도 하고 밭작물을 가꾸고 매실나무를 손질해 왔다. 땅을 매만지고 사는 것이 곧 하늘을 매만지고 사는 것이라는 걸 그분 얼굴에 패인 주름과 깊은 말씨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손수 밥을 대접하는 정신부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창고이며 작업실이며 식당인 나무집에서 항아리를 엎어놓은 위에 마련한 식탁엔 김치와 몇 가지 반찬이 이미 올라와 있었다. 연락을 받고 미리 점심밥을 준비하신 모양이다. 신대원 신부가 준비해간 뼈해장국을 덥히고 밥그릇에 밥을 얹는 것도 그분의 몫이다. 손수 밥을 대접하는 정신부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겉멋이라곤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다. 자연에 미처 다 합류하지 못해서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 같다.

밥 먹으며 권정생 선생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혈육처럼 마음 부비고 살았던 터라 이오덕, 권정생, 이철수... 익숙한 이름들이 엮이어 나오기 마련이었다. 권정생 선생이 유언장에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라고 적어 놓았는데, 이 때문에 자신이 ‘잔소리 심한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게 무척 심기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생각이 아이 같고, 아이처럼 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권정생 선생에게 사실 싫은 소리를 많이 하긴 했던 모양이다. 권 선생도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은 싫어서 뭔 말만 하면 잔소리한다고 투덜대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마저 그만두었다는 정호경 신부는 이치에 밝은 분이라 권 선생 사는 게 퍽이나 답답했던 것이다.

창고겸 식당 겸 작업실. 짚으로 엮은 낫꽂이가 보인다.

미리 정리할 건 정리해 두어야지

이를테면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권선생이 인세를 받은 돈을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지’ 하며 살았다지만 10억이나 되는 돈을 쥐고 있었던 게 못내 아쉽단다. 생전에 다 주어버려야 하는데, 죽어서도 건더기가 남아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걸 보고 최근에 정호경 신부도 한 가지 배웠단다. 미리 미리 정리할 건 정리해 두어야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 소유로 되어 있던 이곳 비나리 땅뙈기를 이미 교구 명의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그날 되면 고스란히 몸만 가면 되게끔 말이다. 권정생 선생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정신부는 “그 사람(권정생)은 유언에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 젊은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다시 태어나도 연애 그거 못할 것 같아. 수줍음이 많아서.”

 

어찌 보면 생활 자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 고운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다. 항상 정호경 신부가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몸이 병약하여 노동할 수 없음을 부끄러워했다는 권정생 선생. 정신부가 “글 짓는 것도 대단한 노동”이라고 해 준 말을 듣고 안심했다는 선생이다.

수돗가에서 설거지 구경을 하며 말 붙이는 정신부.
 

 

 

할머니 같이 소꿉동무처럼 쪼그리고 옆에 앉아

신대원 신부가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소꿉동무처럼 쪼그리고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럴 때면 어깨를 움츠린 모습이 마치 할머니 같다. 동화에도 나오는 달이가 죽고 새로 들인 반달이도 다른 친구에게 맡겼다고 했다. 이 동네에 포악한 녀석이 한 놈 살아서 개만 보면 그렇게 행패를 부렸던 모양이다. 밭에 일 나갈 때마다 집에 혼자 있을 반달이가 신경이 쓰여서 결국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다. 그나마 있던 식구 하나를 떠나보내고서 마음은 고적했을 것이다.
 


방에 들어가니, 작은 등불 아래 아늑한 느낌 그 자체였다. 방안이 온통 어둔 조명으로 더욱 황토빛이다. 아마 그곳이 서재인 모양이다. 작고 긴 방에는 돌에 새긴 전각 작품들과 책이 그득 들어차 있었다. 책상 옆에는 손목시계와 조각도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손수 그린 할머니 그림. 오윤의 판화 한 점. 미륵반가사유상 사진. 그리고 최근에 당신께서 묵상하며 성경 구절을 골라 새긴 목판각. 그 목판들이 옆구리를 보이며 가지런하다. 그게 <전각성경 말씀을 새긴다>(햇빛출판사)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전각성경을 보고 정양모 신부는 “그의 ‘단상’에선 청량산 도인이 묵상한 신의(神意)를 엿보고 전각에선 그의 필치 신운(神韻)을 즐기기 바란다”고 추천했다.

연민의 사람, 사랑에 실패한 사람, 고흐를 보여주며

 

최근엔 연세 때문인지 예전처럼 농사일에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후배신부들이 권해서 매실나무 밭에도 바닥에 부직포를 깔아서 잡초 뽑는 일을 줄였고, 소소한 밭작물도 요즘엔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호경 신부가 방에서 보여준 것은 고흐의 책이었다. 영문판인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흐의 그림이 다수 발굴되어 실려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그 책을 보여주며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은 이 책을 틈틈이 번역하고 계신다. 고흐가 보리나주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가난한 광부들처럼 허름한 움막에 살며 예배하던 이야기며, 그 첫사랑에 실패한 이야기, 동생 테오와 나눈 우정 등등. 특히 ‘감자 먹는 사람’의 여러 판본을 보여주며 고흐가 얼마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섬세하고 깊은 애정을 담아 왔는지 알려주었다. 고지식하고 거만한 교회에 대해서도 분개하였다. 고흐는 그런 교계의 성직자들에 의해 면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당신이 쓰신 <자서전> 원고뭉치를 던져 주었다. 꼼꼼히 손글씨로 원고지에 적어 내려간 것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살며 생각했던 것을 담았다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에 겪는 경험담, 양친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어린시절의 애잔한 이야기가 씌어있다는 것이다. 만약 책으로 만들면 흐릿한 할머니이 사진을 표지에 넣어달라고 한다. 미루어 헤아리기 어려운 삶으로 짐작되건만, 여전히 가난과 동무하며 15년째 농사를 지으신 것은 불우했던 그 모든 시간들 역시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낭비없는 삶

 

정호경 신부을 만나면서 느낀 가장 큰 소회는 “항상 창조적인 일에 몰두하신다”는 것이다. 농사며 매실효소 만드는 법, 전각, 집짓기, 그림, 번역 등. 정신력과 손으로 가능한 일은 한번 해보는 것이다. 하다 보면 맛들이고, 맛들이면 장인이 된다. 낭비 없는 삶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분만의 고유한 힘이다. 예전에 함창에서 본당사제로 일할 때 만나 뵙고 처음 찾아간 정호경 신부. 예나 지금이나 말씀은 때로 까칠하지만, 그 안에 깊은 애정이 녹아들어 있음을 나는 사람들은 그분에게로 간다.

다시 라면에 밥 말아먹고, 길을 떠나려 하는데, 이다음에 또 찾아뵙겠다고 여쭙자, “오면 일부터 해야 돼” 하신다. 남들 다 일하는데 시골에 그냥 놀러 오는 건 안 된다는 평소 지론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럼요, 신부님.” 웃으며 인사를 드리고 비나리를 빠져 나왔다. 차창으로 보이는 청량산이 저녁빛을 받아 더욱 정겹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준다. 

 


 

 

 

 

 

 

 

 

 

 

정호경 신부와 신대원 신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2008-07-08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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