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감독 켄 로치, 2006년작(2006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제주도 출신의 몇몇 지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의 고향 제주도의 풍광을 연상했다고 한다. 수백 년간 영국의 압제에 시달려온 아일랜드와 한반도 내의 내부식민지 같았던 제주도의 슬픈 역사가 겹쳐졌다. 예수살이공동체 청년미사 때 골롬반회의 오기백 신부와 자신의 조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대해 잠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 신부는 자신이 한국에 1976년도에 왔기에 한국인으로서는 76년생이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하면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등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문인들, U2와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게리 무어(북아일랜드 생)를 비롯한 세계적인 대중음악가, 온갖 세계적 기록을 담은 기네스북을 주관하는 기네스 맥주, 미국의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가톨릭 대통령 JFK, 한국 일부지역에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했던 골롬반회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복거일이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 모국어인 게일어를 잃고도 영어로 자신들의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는 ‘애란’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 ‘애란’이 바로 아일랜드다. 훗날 ‘영어공용화’를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복거일의 주장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이런 몇몇 친숙함을 넘어 이 나라와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고약한 이웃에게 시달렸던 식민경험의 동병상련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국의 국보임이 틀림없는 켄 로치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아일랜드의 힘겨웠던 역사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독립의 열기가 무르익던 1920년대 아일랜드. 아무런 저항할 힘도 없는 십대 소년 미하일은 영국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망설였던 젊은 의사 데미안은 기차역에서 목격한 영국군의 폭행을 목도하면서 런던행을 포기하고 이내 IRA(Irish Republican Army)에 가담한다. IRA는 마치 일제시대에 우리 독립군이 불령선인 취급 받듯이 부랑자,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는데, 이들이 거대한 힘을 지닌 영국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 무기도 빈약하고 군복도 없는 오합지졸의 군대처럼 보인다.그러나 싸워야 할 이유를 분명히 알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수 있다.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인 형 테디 오도노반, 미하일의 누나이자 자신의 애인인 시네드와 더불어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시작하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영국군에게 붙잡힌다. 테디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모든 것을 불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테디의 손톱은 하나씩 뽑혀나간다. 마치 옛이야기나 구시대의 퇴물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고문의 기억과 흔적은 우리에게 아직도 생생하다. 군사정권 시절 야비하고 입에 담기조차 힘들었던 성고문에서부터 차라리 목숨을 끊고 싶게 만들었던 상상을 초월한 고문들이 우리 곁에 있었다. 여러 선배들에게서 고문당한 경험을 듣기도 했는데, 한 선배는 등산 중 별로 높지도 않은 산자락에서 아찔해하는데 그것이 고문후유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테디는 고문에 굴하지 않았으나 잡힌 사람 모두 곧 처형될 운명이다. 다행히 어린 아일랜드계 영국군의 도움으로 이들은 도망갈 수 있었다. 독립군 상부에서는 밀고했다는 이유로 동지인 크리스를 처형하도록 한다. 이때 데미안은 이를 악물고 형리를 자처한다. 크리스는 글도 제대로 못 써 유서도 못 쓰고 단지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아이였다. 의사였던 데미안은 사람 하나 제대로 살려보지도 못하고 총을 쏜다며, 이럴 정도 조국은 중요한 가치겠지 하면서 형을 집행한다.

▲ 크리스를 처형하는 데미안. 독립혁명가로 가는 길은 이처럼 가혹했다.

데미안은 이제 독이 오를 대로 오른다. 한때 출세가도를 향해 달렸고, 일개 서생처럼 말로만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했던 이 얌전한 친구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독립혁명의 강을 건너고야 만다.

영국군과 한참 싸우는 와중에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영국세력을 몰아낸 지역에서의 첫 재판이다. 여기서 고리대금업자의 부당이자를 채무자에게 돌려주는 판결이 내려지는데, 테디가 이 판결을 막는다. 그 고리대금업자가 무기를 대주기 때문이다. 정말 어디가나 돈이 웬수다. 여기서 댄이라는 노동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우리 모두 돈 없는 가난뱅이인데 가난한 여인의 편을 들지 않고, IRA가 지주의 편에 선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새로 국가를 건설할 때 그 국가의 제대로 된 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무기자금 때문에 지주의 편에 선다는 것은 나중에 독립해서도 결국 폭압적인 영국의 지배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댄과 데미안이 주고받았던 코놀리(James Connolly, 1868~1916,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으로 아일랜드의 사회주의 지도자이자 혁명가, 아일랜드 노동당을 창당하는 데 기여함)의 연설 구절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내일 당장 영국군을 몰아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여러분이 사회주의공화국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모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땅을 계속 지배하는 것은 영국의 자본가와 상업단체가 될 것입니다.”

댄은 데미안을 받쳐주면서 독립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지어주는 인물이다.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어떠한 독립이어야 하는가다. 단순히 아일랜드 땅에서 유니온잭을 몰아내는 것이 독립이라면, 새로 독립한 나라가 이전과는 다른 체제로 변화되었을 때 이를 독립혁명이라 명명할 수 있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했으나 여전히 억압과 폭력이 자행되었던 여러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독립이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켰다기보다 단지 폭압적 지배자가 외세에서 동포로 바뀌었을 뿐인 경우가 많다.

▲ 감옥에서 만난 데미안과 댄. 데미안은 많은 것들을 머리로 배웠다면 댄은 몸으로 모든 것을 배워왔다.어쨌거나 그들은 이제 하나의 길로 간다.

결국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 평화조약이 성립된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은 아니며, 자치령으로 새 의회는 영국의 왕실에 충성을 서약한다. 여기서 독립군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 자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 테디로 대표되는 자치파는 영국이 이 정도면 정말 많이 양보했다.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정말 심각하게 피를 본다는 것이다. 이때 자치파에 맞서 데미안이 똑소리 나는 한마디를 한다. “이 조약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권력자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해주고, 국회는 총독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데미안에 가세하여 댄은 공화당 프로그램 대목을 읽어준다. “국가의 주권은 국가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소유와 국가의 토지, 자원 등 모든 부와 그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까지 미친다.” 즉 이 나라의 모든 것은 국민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아일랜드 독립의 실체를 봐야 한다. 그것은 민족주체성이니, 민족자주니 하는 개념과 별도로 아일랜드인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더 우선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립을 배경으로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넘어 선다.

▲ 기쁨의 잔치가 벌이지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한다.이들이 투쟁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일상이리라.

어쨌든 영국군이 철수한다. 완전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을 억압했던 군대가 철수한다는 것은 기쁜 일임이 틀림없다. 북아프리카의 리비아는 2개의 국가 공휴일이 외국군이 철수한 날(3.28 영국군 축출기념일, 6.11 미국군 축출기념일)인데, 우리도 언젠가는 외국군이 철수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하여튼 영국군은 철수했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은 자치파의 군대와 기존의 독립군의 군대가 충돌하는 내전상황이 발생한다. 자치파 군대의 무기고를 습격하다 댄은 죽고, 거기서 잡힌 데미안은 테디의 제안을 거부한 채 총살을 당한다. 데미안의 손에는 여행자의 수호성인 성 크리스토퍼의 메달이 쥐어져 있다. 그것은 영국군에게 학살당한 시네드의 동생 미하일의 유품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동생의 유품이 이제는 사랑하는 연인의 유품이 되어 유서와 함께 테디를 통해 시네드에게 건네진다.

영화의 줄거리만 보자면 운명의 갈림길에 선 두 형제의 선택 그리고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켄 로치가 그렇게 말랑말랑한 감독이 아니듯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국가건설(nation-building)의 과정이다. 켄 로치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확고하고도 아름다운 당파성을 놓지 않는다.

아일랜드의 나라 만들기를 보면서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의 온갖 비극을 식민시대로 귀결시키곤 한다. 그런데 보다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키워왔던 저력들이 새로운 나라 건설에 동력이 되지 못했다는 데 그 비극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맑고 장대한 에너지들은 온데간데없이 친일파와 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 세력의 건국이 정통성을 갖고, 이후 박정희 식의 마구잡이 근대화가 한국 국가건설의 주된 흐름이었다. 외형적으로 번듯해 보이고 실제로 많은 성과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국인의 피와 땀을 담보로 한 것이었고, 많은 왜곡과 기형을 낳았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 789 노동자 대투쟁은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퇴행을 반복해서 경험했지만, 그나마 이런 움직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견디고 나아갈 힘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다.

한겨레 기자였던 손석춘은 자신의 소설 <아름다운 집>에서 한국사의 아쉬웠던 순간을 아래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울러 <나쁜 사마리아인>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저자 장하준 교수의 메모를 덧붙인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대한 아주 간결한 메시지다.

“혁명이 무엇인지 진이 동무는 아세요.”
뜬금없다는 듯 진이가 방긋이 웃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요.”
“진이 동무. 지금 우리가 제대로 사회주의 사회를 못 만든 것뿐이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린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옳습니다. 돈이 중심되어 우리들의 아들딸까지 지배하도록 방관할 수만은 없지요.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되는 사회, 수령이 아니라 인민이 중심되는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죠. 우리들의 혁명사가 그 단순한 진리를 핏빛으로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요. 문제는 누가 오늘 그 일을 할 것인가에 있지요.”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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