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김기석, 청림출판

나이 사십 가까이 되어 딸을 하나 얻었다. 오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전라도땅 무주로 귀농한 그 해 겨울이었다. 눈이 자북자북 쌓이는 날이었다. 산골 농가에 선물처럼 꽃등이 하나 더 내걸린 셈이다. 밤새 창밖은 하얗고 푸르스름한 빛을 잃지 않았다. 겨울밤 적막한 산촌(山村)에서 조금은 외로웠을 젊은 부부를 위로하는 불빛이다. 그 아이가 지금은 자라서 초등학교 1학년이다. 아이는 항상 볼떼기가 달아오르고 콧물을 떼지 못하면서 겨울을 보내곤 하였지만, 봄이 되면 마을 아이들과 뒤란의 대숲을 가로질러 산길을 뛰어다니고, 가파른 언덕길을 잘도 오르내렸다. 경운기조차 장난감 삼아 놀고 가을에는 엄마와 마늘을 심다 호미를 밭고랑에 내던지고 이내 동무들에게로 내빼곤하였다. 아랫마을에 마실을 다녀올 때면, 업어달라고 칭얼대다가 걷다가 아빠 등짝에 기대 잠이 들곤하였다. 그런 날 밤이면 어김없이 머리 위 앞산 숲 위로는 초승달이 시퍼렇게 눈썹을 휘날렸다.

우리 가족은 이태 전에 경주로 이사 와서 국립박물관 근처에서 살고 있는데, 먹고 살기가 막연해서 아빠는 다시 서울에서 밥을 벌고, 한 주일이나 열흘에 한 차례 경주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논 한가운데 우리 집이 있다. 산골에서 보기 힘든 저녁놀을 볼 수 있는 것은 서라벌에 사는 이가 누리는 복이다. 지난 주말에 집에 갔다가 아이의 실내화를 빨았다. 닳아빠진 칫솔에 빨래비누를 묻혀 아이의 작은 신발을 빨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신발을 빠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손바닥만 한 신발을 손아귀에 쥐고 하얗게 닦으면서 명치끝이 조금 아려옴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는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아프게 다가오더라도 좋은 것이다. 가난한 날은 가난할수록 정겹다. 내 혼이 더욱 깊이 스미어, 생을 위한 안간힘이 배어서 오만 정(五萬情)이 붙어있는 까닭이다.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불렀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삶이 허기질수록 밥 한 술에 담긴 눈물이 얼마나 고운 줄 알게 된다.

얼마 전에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김기석 목사님이 쓰신 글이란다. 난 그분을 잘 모른다. 내가 가톨릭 신자여서 그런지 그분 이름을 접한 적도 없다. 글이란 다소간의 분식이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쓴 이의 얼이 담기기 마련인데, 생면부지의 사람을 책으로 읽으려니 좀 곤혹스럽다. 다행히 책머리에서 나는 김사인 시인을 통해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간의 안면이 있는 김사인 시인은 촌색시 같은 느낌을 주었던 분인데, 첫 만남부터 참 순정한 영혼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이런 시를 처음부터 인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족속일지 모른다는 예감을 느낀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공간에서나 인생의 어둡고 캄캄한 그림자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권력을 탐하지 ‘못’하고, 상처받은 이에게서 오히려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아 순한 눈빛을 지녔지만 부당함에 직면하면 단연코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다른 언어로 표현다면, ‘식물적’ 인간이라고나 할까? 먹이를 찾아 하루 종일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동물과 달리, 오로지 한 자리에 머물러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기 위해 수액을 제공하는 뿌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땅을 떠나지 않으면서 하늘을 응시하는 사람들이다. 살면서 얻은 모든 ‘사람’을 켜켜이 몸에 새기며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 몸 안에 새겨진 사람들이 나무의 풍경을 이룬다. 김기석 목사님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빛과 어둠, 희망과 좌절, 기쁨과 슬픔, 충만과 무력감이 갈마드는 과정이겠다. 그 모든 과정의 한복판에는 만남이 있다. 누구를 어떻게 만났느냐가 지금 내 삶의 풍경을 규정짓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뿌리에서 왔다는 말이 있지만, 나의 주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것임이 분명하다. ‘나’라는 존재 속에는 타자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라는 이 책은 그러한 타자들과 나눈 교신이다. 타자의 삶이 던져준 질문에 대하여 몸으로 응답하는 언어다. 이 책에선 공동체의 길, 자아의 길, 교회의 길, 세상의 길이라는 테마로 나뉘어 있으나, 결국 길은 하나뿐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길은 예수의 길이다. 그리고 예수의 길은 한없는 연민의 길이다. 지리산 백무동 계곡을 걸으며 눈으로 산자락 더듬는 그분의 선생님의 눈길을 보고 “세월의 풍상에 삭아버린 어머니의 슬픈 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해”보였다고 하였으나, 기실 그 마음을 품은 사람은 목사님 자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삭아버린 어머니의 슬픈 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참 복되다. 그가 예수의 마음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의 입을 빌어 ‘자비의 정치학’에 대하여 말하는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께서 주목하신 사람들이 당대의 율법학자들이 강변했던 ‘거룩함의 정치학’에서 부정하다 판단되었던 땅의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죄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자비의 에토스는 사방으로 확장된다. 그는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말한다. “저는 꽁꽁 언 땅을 걷는 비둘기의 빨간 발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먹이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인기척에 소스라치듯 놀라 달아는 야생고양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할 때도 있습니다. 어쩐지 그 생명과 나의 생명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몸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 괜히 가엾어 가만히 그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목사님은 이게 감상적인 것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봄을 간직한 사람의 마음은 응당 이래야 하고, 모든 위대한 예수의 길은 이런 여린 마음에서 첫 발을 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온몸의 세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의 축복이다. 그들은 슬픔을 눈물로 응답하며, 기쁨을 박수치며 맞이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 소제목만으로 가슴팍에 차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눈 뜨고 기도하라.” 목사님이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했던 문한별 씨의 글을 인용한 것인데, 이라크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한다.

야만의 시대에
눈감고 기도하는 것은 비겁이다. 기만이다.
불의한 시대에
화음으로 찬양하는 건 동조다, 묵인이다.
그대여 기도하려거든
차라리 눈을 떠라
죽어가는 형제자매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대여 찬양하려거든
차라리 외론 목소리로 진혼가를 불러라.
저기 당신의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

그 자리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자신이 그동안 눈 감고 기도했음을 자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책을 넘어서 이제는 눈을 뜨고 세상의 고통 한가운데서 기도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느님께 소집명령을 받은 자의 적실한 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평화로 가는 길에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보면서도 자기가 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예수의 길임을 확인한다.

목사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엔도 슈사꾸가 읽어낸 예수의 시선으로 말한다. <사해의 호반>이라는 책에서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말한다. “목수가 하는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성도 예루살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다윗 성전이나 엄숙한 율법 등은 하나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신다. 하느님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인간뿐이지 황금으로 세워진 성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보다도 창부의 눈물 한 방울을, 랍비의 말보다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훨씬 더 원하고 계신다라고까지 말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어제도 실로암 연못 근처에서 순례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사슬 문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관하여 묵상한다. 누구나 참살이를 하려면, 이웃의 고통에 대하여 모든 감각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례전보다 중요한 것은 ‘연민’의 눈빛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짓기 전에 먼저 빈민가에 가서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으라고 했던 간디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고 책은 말한다. 실상 예수가 사라진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즘 돌아보면, 모든 교회가 위기임을 알리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샘물교회 신도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혀갔던 사건을 둘러싸고 ‘선교’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는 것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깊이 침식당해 있는 교회의 상업주의적 관행을 비롯하여 종교가 권력화 되어 예수가 거절했던 모든 것을 다시 끌어안고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아니면 제 상처만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며 하느님께 매달려 기도만 하라고 다그치는 목회자들도 문제는 문제다. 일부 목회자들의 호주머니는 어느 순간 예수 정신을 길바닥에 흘려버렸고, 다시 찾을 길 없어 황망하다. 예수는 없고 성전만 남았는데, 성전은 급기야 예수께서 말씀 하신대로 운명적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역시 2005년 인구센서스 조사결과와 상관없이 실제로는 70%에 달하는 수많은 신도들이 냉담상태에 있는 사목실종(司牧失踪)의 지리멸렬 상태이다. 요즘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치고 누가 교회를 기꺼이 복음의 담지자라고 부를 것인가? 교회가 이처럼 지각 있는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소금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감미료뿐이다. 그러나 대중은 가짜 천지인 세상을 지겨워하고 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이를 두고 한국교회의 ‘추문’이라고 고발하며, 우리 교회가 이를 벗어나는 길은 ‘거룩한 분노’와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 ‘바빌론의 탑’에서는 몇 대에 걸쳐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는데, 급기야 이들이 하늘의 천장에 닿아 그 천장에 구멍을 뚫는 순간에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어나니 황량한 광야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가 뚫어야 할 것은 하늘의 천장이 아니라 현실의 벽이라는 것이다. “희망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사람들, 울 기운조차 없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 삶의 막장에 선 사람들에게 빛을 돌려주기 위하여 땀 흘리지 않는 한 하늘을 향한 우리의 발돋음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은 급기야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방치하거나 온존시키는 모든 세력들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발언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선 세상의 불의와 거짓에 맞서는 거룩한 분노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는 근원적 확신에 바탕을 둔 근본적 낙관주의와 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 분은 영성과 실천이 통합될 필요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가 말했던 ‘저항과 신비주의’가 얼마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지 보여주는 진실이다. 거룩한 분노에 따른 저항의 와중에도 부드럽게 웃을 줄 알고, 세상의 작은 것들 앞에서 멈춰 설 줄 알고, 생의 신비에 세포를 열어두고 있는 사람만이 은총 안에서 불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인들에게 있어 투쟁의 뿌리는 기도여야 하고, 그 무기는 사랑이어야 하며, 투쟁의 전리품은 생명과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따뜻하고 고요하면서 단호한 혁명을 기대하는 것이다. 고발도 중요하지만 위로할 줄 알아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하늘을 열어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책에서 줄곧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김기석 목사님의 신앙은 나와 너는 남이 아니며, 내가 모든 사람이며, 그 사람이 곧 나라는 우주적 연대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이 말하듯이, 세상의 어느 사람 하나가 어깨 들썩이며 울고 있다면, 내 마음도 함께 젖어 슬퍼한다는 진실 위에 있다. 그래서 그분은 마종기 시인의 ‘겨울기도’란 시에 공감한다.

하느님 나를 항상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없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세운 감옥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 사랑을 잃은 자는 갑각류를 닮아 무관심 속에서 타인을 자신과 단절시킨 채 고립된 삶을 살게 되는 까닭이다. 이웃이 없을 때 우리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친밀감을 나누어가질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말을 건넬 사람이 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우주에서 고립되고 하느님과 단절된다. 그가 현실적 성공을 누린들 무엇하랴, 더불어 기뻐해줄 사람이 없는데. 그가 큰돈을 교회에 기부한들 무엇하랴, 하느님께서 이를 달가워하지 않으실 텐데. 우린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길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에 생명의 물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임을 이 책에서 다시금 배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아들을 잃고 상심한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시들어가는 화초를 보고, “너나 나나 무슨 죄가 이리도 많아 목이 마르냐?”하시며 화초에 흠뻑 물을 주고 내려왔는데, 한결 기운이 새로워졌다는 이야기는 참 의미심장하다. 목마른 것은 화초뿐이 아니다. 그 할머니도 목이 마르고 예수도 십자가상에서 목이 말랐으며, 세상의 많은 이들의 목이 타들어가고 있다. 이를 직감하고 물을 주는 자는 복되다, 물을 주는 자의 갈증도 사라지리니. 그렇게 작은 아픔과 희망에 주목하는 가운데, 우리는 사람에게로 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각박한 세상과 교회현실 안에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맑고 시원한 성찰의 물 한 모금 내게 선물하고 있었다. (2007.10.4)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