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88년 작, 2002년 한국 상영

 

 

뮤지컬로 더 유명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영화로 보았을 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할 때에 비행기와 탱크가 나타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늘나라로 올라온 유다가 왜 자신에게 이처럼 힘든 일을 시켰냐며 절규한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그때 그 영화의 강한 인상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는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신성모독 혐의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금서목록에 지정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니 감독은 영화의 스크립트를 만들어놓고도 5년 동안이나 영화를 만들지 말지에 대해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끝에 영화를 만들었는데 역시 반발이 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 매달린 장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성관계 장면 묘사는 실로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수입된 지 몇 년 만에야 겨우 상영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고 한다.

하여튼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매우 인상적이다. 예수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유다가 들이닥쳐 예수의 멱살을 잡고 지금 무슨 짓을 하냐며 조심하라고 엄포를 놓고 간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에게 침을 뱉는 장면이 나온다.

 

 

▲ 도대체 지금 예수는 무엇을 하는 걸까?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일반적 예수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일으킨다. 그 가운데 열심당원의 표적이 되는데, 그들은 예수가 기껏 살려두었던 나자로를 암살하기까지 한다. 사실 유다의 역할은 예수를 감시하는 열심당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예수의 강력한 동반자가 되고 만다.

예수는 사탄의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예정대로 십자가의 길로 향한다. 유다는 예수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예수는 강한 네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유다를 설득한다.

 

▲ 첫 번째 기적을 이루는 현장에서 사람들과 흥겹게 춤을 추는 예수.

 

 

▲ 십자가의 때가 다가왔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나눈다.

 

때가 다가왔다. 예수는 로마군에게 끌려가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 때, 천사의 느낌을 자아내는 한 소녀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풀어준다. 소녀는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었으니 이제 그냥 보통사람처럼 잘살아가면 된다고 한다.

 

 

▲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이 있었던 빈자리를 보는 예수.

 

예수는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아이도 낳고 잘살아간다.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서는데, 한 사나이가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바오로 사도다. 예수는 그에게 가서 나는 지금 여기 있다며 사기 치지 말라고 따진다. 그러자 바오로는 당신이 예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얼마나 큰 복음인 줄 아냐며 당당히 맞선다.

오히려 떠나가는 예수에게 오늘 당신과의 만남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예수의 부활은 뒤로하더라도 사람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던 사건의 사실성에 대한 테제, 그리고 어떠한 면에서 그리스도교는 바오로에 의해 윤색된 바오로교라는 혹자들의 지적이 떠오른다.(이는 바오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인간적인 삶을 이어간 예수는 이제 인간적인 죽음의 순간을 맞는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온다. 그중에서 방금 전까지도 싸우다가 나타난 유다가 예수에게 우리가 싸우는 동안 당신은 도대체 무얼 했냐며 격렬하게 따진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풀어준 존재가 결국 사탄이었음도 알게 되는 예수는 남은 온 힘을 다해 십자가로 돌아가려고 한다. 예수는 다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 유다는 예수에게 격렬하게 항의한다.

 

예수를 찾아온 ‘마지막 유혹’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 십자가의 길을 접는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부활하였기에 그리스도가 되었다. 만약에 예수가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자신을 버리고 진정한 새 삶을 얻어내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겁이 많던 제자들이 나중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예수를 좇아 십자가를 받아들였기에 예수는 한층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위대한 생명과 영광을 위한 처참한 죽음과 패배의 행렬이라는 역설들이 그리스도교의 바탕이자 힘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버트란트 러셀 경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그리스도교가 로마와 타협하고, 로마문명을 숙주로 제도교회가 만들어지면서 이제 십자가는 하나의 기호체계이자 장식품으로 전락하였다.

 

▲ 예수 다시 십자가로 돌아오다.

 


십자가에서 이어진 부활사건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기반임을 상기시키는 이제민 신부의 글은 많은 경우 애써 눈감거나 지나처버렸던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적나라하게 짚는다.

“그리스도교는 죽은 시체의 부활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생명의 의미를 잃고 시체처럼 살아가는 인생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종교, 그래서 진정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종교, 그렇게 살아나가도록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우는 종교다.”

“종교인도 작아져야 한다. 보잘것없는 종교인, 가난한 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기름이 부어지고 영이 내리도록 무릎을 꿇고 겸손해져야 한다. 작은 종교인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민,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바오로딸, 2003)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해석학적 함의를 뒤로하고 그 기적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예수에게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냥 신비한 능력을 가진 한 마법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가 생략된 예수 또는 그리스도교는 ‘앙금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가슴속에서 십자가를 결락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학강사 교원 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를 위해 농성 중인 김영곤․김동애 선생을 2007년 초에 처음 뵈었다. 그때 김동애 선생은 종교 또는 교회는 각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억압에 맞서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며칠간 마음속에서 깊게 울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교회가 지녀야 할 시대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말씀을 지금에 적용한다면 교회는 돈이 모든 것을 장악한 ‘시장전체주의’를 좌시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감히 단언컨대 만약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면 ‘시장전체주의’가 모든 것을 장악한 작금의 상황을 이글이글 타오른 분노의 눈빛으로 직시했을 것이다.

십자가가 ‘텅 빈 기표’로만 남아 있는 교회는 참 슬프다. 말랑말랑한 사랑의 언어로 대충 얼버무리려 하고 시장에 투항한 교회는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교회가 작금의 수많은 처참한 상황에 눈감고 애써 외면한다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그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란 기쁘면서도 십자가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참으로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예수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나 십자가 내려놓으라는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는 영화 속 ‘최후의 유혹’에 맞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말 예수 따르기로 그분 닮기로 했다면 그 외에 무얼 더 생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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