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안수찬]

만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여 꽃다웠던 모든 것을 두 딸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꽃처럼 어여뻤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마누라의 충격적 증언에 따르면, 나는 했던 질문을 금세 또 한다. “… 그래서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밥 먹었냐, 애들은 뭐했냐 등을 빼면 화제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부부의 밤늦은 대화 가운데 마누라는 종종 눈을 찢는다. “또 저런다 또. 방금 물어봤고 방금 말했잖아. 오빠, 정말 왜 그래?” 같은 질문을 금세 물었다는, 5분 전도, 10분 전도 아니고, 바로 직전 대화에서 물었다는, 나로서는 절대로 인정할 마음이 없는 사태가 또 벌어진 것이다.

“우리, 말 편안하게 하기로 해요. 선배는 싫고…. 그냥 오빠라 부르면 어때.” 15년 전,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손발 오그라드는 존댓말로 상대 진영을 탐색했고, 1년 뒤에는 서로 반말하며 안전핀을 뽑았으며, 다시 반년 뒤 결혼이라는 폭탄의 시건장치를 함께 터뜨려 버린 것인데, “여보”라는 호칭을 나중에 쓰기로 합의한 것까진 괜찮았으나 세월 흐르는 줄 모르고 지금까지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아내 덕분에 나는 여전히 20대인 줄 알고 지내다가 오직 문제의 건망증이 도질 때만 뇌세포에 새겨진 생물학적 나이를 비감한다. 아, 이젠 ‘오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오빠’는 이 분야와 관련해 더 충격적인 사태를 지난해 가을에 겪었다. 어느 날 아침, 오빠는 신문사 맞은편 식당 앞에 차를 세워뒀다. 신문사에서 오전 내내 일하다 차를 세워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인터뷰가 있었다. 차를 향해 걸으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자동차 열쇠가 없다. 가방 안에도 없다. 사무실에 돌아와 서랍을 뒤졌으나 역시 없다. 잠시 고민했으나 인터뷰에 늦을까봐 택시를 잡아탔다. 해질녘 사무실로 돌아와 찬찬히 하나씩 뒤졌는데 아무래도 없다.

서비스 요원을 불러 차문을 연다 쳐도 열쇠조차 없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하며 무력한 마음으로 어두컴컴한 주차장 한 켠 자동차 앞으로 걸어간 오빠는, 울어버릴 뻔 했다. 자동차 열쇠는 시동 걸린 자동차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바로 옆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던 점심을 거쳐, 수많은 사람이 곁을 오간 오후와 저녁 내내, 누가 문을 열고 액셀레이터만 밟으면 바로 출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오빠의 차는 10여 시간을 그르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는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중에 오빠는 10여시간의 ‘공회전’에 혹사당한 자동차의 부품 정비에 많은 돈을 바쳐야 했는데, 그 돈으로 공포의 건망증을 고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자동차 열쇠를 꼬옥 쥐며 생각했던 것이다.

뚜껑을 열어 직접 살펴본 바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으나, 아직은 전두엽 피질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10년 전, 그러니까 ‘오빠’라는 호칭도 제법 그럴듯하게 어울렸던 시절, 어느 시민단체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나는 이런 글을 기고했다. “세상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를 '꽃병'이라 불리던 원시적인 무기에 담아 하늘로 날렸던 게 10년 전이다. 그때 나는 서른이면, 치열함으로 꽉꽉 채워 보낸 나이 서른이면 삶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역사책들은 서른 즈음에 세상을 뒤흔든 수많은 혁명가의 이야기를 품고 오늘도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기자들이 제 몫을 못하고, 젊은 세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미래는 없다. … 젊은 기자들이 꿈꾸고 음모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난 세월은 한없이 가슴 아플 뿐이다. 수많은 `나이 서른’의 세대에게 한국의 언론은, 역사는 지금 무엇을 말하는가.”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글을 2000년 무렵에 썼다. <한겨레>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대형 기획 기사를 썼고, 정부는 이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독재 정권과 특혜를 주고받은 과거와 마땅히 납부해야할 세금에 대한 현재를 따져묻는 일에 그들 언론사는 온 몸으로 뻗댔다. 이들은 프레임 설정에 탁월한 바가 있는데 자칭 ‘야당지’ ‘저항지’를 불러대며 민주정부에 칼날을 세웠다. 당시 나는 각 언론사에 있는 동년배 ‘서른 살의 기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고 살면 행복하냐. 만족스럽냐. 그렇지 않다면 도모해라. 힘들면 같이 하자. 그게 우리 나이에 걸맞은 일이다….  

그런 구상의 밑바탕에는 ‘단독자 기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기자는 조직원이 아니다. 부속품은 더군다나 아니다.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기자는 오직 단독자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쓴다. 그 책임도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마땅하다. 판사, 교수, 의사를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조직에서 주는 월급을 받지만 그 역할은 ‘자기 완결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개인이 조직을 표상하는 동시에 조직은 개인을 보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한 이가 판사라는 개인을, 배우려는 이가 교수라는 개인을, 아픈 이가 의사라는 개인을 신뢰할 이유가 없다. 조직의 최고결정권자인 법원장, 총장, 병원장에게 문의하고 따지고 길을 구해야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원래 검사도 이들과 비슷한 독립체로 꼽아야겠지만, 요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오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월급장이가 맞는 것 같다)

기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선 시민사회를 대변한다. 다만 선출된 대표가 아니므로 ‘추상’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염두에 두고 권력과 긴장한다. 무엇을 취재하고 쓰고 말할지 자신의 상식과 합리에 비춰 판단한다. 다만 개인인 기자는 하나의 직업적 공동체를 이뤄 오류와 편견을 최소화하려 애쓰는데, 그 시공간이 바로 뉴스룸이다. 뉴스룸은 직업적 편의를 위해 데스크·취재기자 등으로 노동과정을 구분하지만, 원론적으로 뉴스룸 안에서 모든 사람은 (편집국장·부장·평기자가 아니라) 오직 기자다. 기자의 정당성은 위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기자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수족일 뿐이고, 모든 기사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발언일 뿐이다.

친일 부역한 언론, 독재정권에 아부한 언론, 사주의 이익에 충성하는 언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음 편한 기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 모든 과오는 그 기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저런 인생의 우연이 더해져 어쩌다 그 언론사에 몸을 담았으나 기자가 되려했던 최초의 마음이 밤마다 되살아나 양심선언문과 대자보와 사표를 썼다 찢기를 반복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결심이란 게 구차한 생계에 발목 잡히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곡절이므로 아직 그런 덜미 잡힐 일이 적은 ‘서른 살의 우리’가 나서면 어떻겠는가. 조직을 대변하여 마음에도 없는 적대의 언어를 필설로 옮기지 말고, “진짜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의 단심을 끄집어 내어, 각자 속한 언론사를 욕하고 흉보면서 자유로운 개인인 기자로서 다함께 뭉쳐보면 어떻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조중동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아직 나이 서른일 때였다.

▲ 200여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지난 1월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조선·중앙·동아 종합편성채널 선정’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방통위의 추가 특혜 지원 움직임을 비판하고 있다. (사진 출처/한겨레>

‘조중동매연’으로 표상되는 보수언론사들이 종합편성·보도전문 채널에 진출하게 됐다. 이 사건의 본질은 아주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가 ‘조중동매연’에게 일용할 양식을 퍼다주었다. 이 밥그릇으로 언제까지 먹고 살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혹자는 신문시장에서 방송시장으로 전환한 조중동매연이 천년 왕국을 마침내 건설할 것이라 전망하고, 혹자는 가공할 자본투입의 부담으로 조중동매연이 오히려 자폭할 것이라 내다본다. 나는 어느 쪽이 됐건 별 상관하지 않는다. 방금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마흔 살의 나로선 적어도 5년은 흘러야 판가름날 언론 시장의 아귀다툼을 벌써부터 예측할 능력이 없다.

오직 분명한 사실이 있다. 모든 기자는 이제 샐러리맨이 될 것이다. 공중파 방송은 기왕의 시장을 뚝 떼어 조중동매연에 억지로 내주었다. 80년 언론사 통폐합의 정반대 방식이지만 그 본질은 거의 똑같은 ‘강압적 언론 시장 조정’이다. 그 결과 공중파 방송의 모든 기자와 피디는 상업적 실적에 목을 매달게 됐다. 새로 뛰어든 조중동매연은 연간 수천억 원의 자본을 투자한 성과를 조기에 이뤄내야 한다.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고, 실적에 따라 고용조건은 널뛰듯 할 것이므로 조중동매연 기자들은 사주가 주는 월급 받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역 신문과 케이블 방송의 언론인들은 매체 자체가 통폐합될 위기에 항상 공포스러울 것이고, 운이 좋아 더 좋은 조건에 스카웃된다 하여도 가공할 경쟁 구조 속에서 하루하루 피를 말릴 것이다. 남겨진 신문·인터넷 매체는 부실의 거품을 안고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경쟁에 어떻든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다른 방식의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는 고비용 방송이 아닌 저비용이자 미래 산업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발판삼는 어떤 전망을 궁리해볼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당장 이익을 남기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야 한다. 진보언론의 존망을 다툰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긴 하지만, 눈을 돌려 ‘기자 개인’을 보면 어느 쪽이건 반가운 일은 아니다. 할 일이 더 많아진다는 불평이 아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장적 판단’이 언론인 일생에서 갈수록 중대해진다는 뜻이다. 그 시장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좌우한다는 시장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이 실은 가장 돈을 많이 가진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다수와 별 상관없이 전개된다. 북금곰은 얼음이 녹으면 사냥할 땅을 잃어버려 마침내 멸종한다. 지금 기자의 처지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립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상식과 합리의 판단을 내려 시민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발바닥 밑으로 꺼지고 있다.

설이 되면 나도 마흔이다. 조중동매연에 있는 나이 마흔 살의 기자들이 어찌 움직이는지 이런저런 통로로 전해 듣는다. 외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출입처에서 닦아 놓은 인맥으로 정재계 인사들과 열심히 만났다고 한다. 종편·보도채널에 선정되기 위해 고급 취재원을 만나 고급 정보를 구했다고 한다. 그들이 지난 1년여 동안 이룬 일의 대강은 오직 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그 방식으로 열심히 일한 기자만이 장차 좋은 자리를 차지해 ‘데스크’가 될 것이다. 그들이 오늘의 일을 밑천삼아 장차 언론사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제대로 된 언론을 구현하겠다는 포부까지 갖추고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오직 사주의 몫인 것을 마흔 살의 기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이 마흔에 우리는 샐러리맨이 되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리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난다. 이 대목에서 건망증은 홀연 사라진다.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 / 내 슬픈 사랑의 작은 종이배 하나”가 생긴다고 가수 양희은은 마흔 살을 노래했다. 마흔살의 나는 조중동매연에서 총대메고 뛰고있는 또래 기자에 대한 한줄기 연민을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다. 자유기자가 되어 시민사회의 광장에서 찧고 까불며 호쾌한 언론을 만들자던 서른살의 제안과 맹세도 함께 떠내려간다. 마흔 살에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기사제공/ 인권연대>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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