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

서울에 얼마나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과 또 다른 종교 시설이 있을까요. 저는 아직 통계를 뒤적여 찾은 적이 없습니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열 집 건너 하나 정도로 십자가가 보이는 서울에서 이미 그런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세상이란 무엇이든 숫자로 표시해야 세상이 굴러간다고 굳게 믿는 수많은 경제인들을 잉태해 놓았습니다. 자본주의란 모태는 워낙 ‘생산성’이 좋아서인지 숫자 계산에 어리숙한 사람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저 또한 어느새 무엇이든 통계부터 살피는 버릇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저 자신도 이미 그저 숫자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주민증 번호부터 시작해서 병원 환자카드 번호, 은행 거래 비밀번호, 심지어 생협의 조합원 번호까지 숫자인 나는 저도 헷갈릴 만큼 많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느새 저도 다른 사람을 숫자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음을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종교조차 오히려 앞장서서 신도들을 숫자로 환원해서 숫자 계산을 하고, 더 많은 신자 더 많은 헌금 더 많은 건물 더 많은 성장과 개발을 앞장서서 부르짖는 마당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와 성경

어느 누구고간에 맨 처음 종교와의 접촉은 경전이거나 시설물이거나 그리고 사람일 것입니다. 성당이건 절이건 성황당이건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티벳 불교 ‘룽다’이건 우리는 그런 특별한 시설을 만나면 무엇인가 성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맨 처음 성경을 통독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감옥에 처음 들어가니 도대체 책이라고는 손바닥만한 신약성서밖에 없어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성경이 그렇게 재미있는 장편서사시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갇혀 있다는 절박함이 더해서인지 두세 번을 읽으면서 저는 예수의 삶과 말이 주는 그 강렬한 상상력과 자극을 전율을 느낄 정도로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체험한 예수는 예수교인들이 들으면 불경스럽다고 할 지 모르지만 참으로 매력있는 실존의 역사 인물이었습니다. 당대의 사람과 사회에 대해 근본의 문제 제기를 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동참하는,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한없이 고뇌하고 때로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습니다.

내가 만난 교회의 피냄새

무어니 무어니 해도 종교의 안내인들은 바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이웃사람입니다. 종교는 결국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랬던 것처럼 안내자로 다가오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얼굴이 종교의 본질 자체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지하철의 소음공해를 마주치게 되면 저는 늘상 이놈의 예수교! 하는 욕지기가 저절로 뛰쳐나올 때가 많습니다. 가히 어떤 경지에까지 이른 게 아닌가 생각이 되는 그들의 광기어린 눈동자에서 저는 파시즘을 봅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때로는 모형십자가를 어깨에 멘 그들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저는 미국식 파시즘을 듣습니다.

애초에 개신교는 서구에서 가톨릭의 썩어빠진 부패와 타락과 억압을 질타하면서 개혁을 부르짖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건너갔고, 수천만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잔인하고도 무참하게 깡그리 학살하면서까지 자신들만의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 미국식 피냄새가 진동하는 기독교라서 그런지 한국 개신교에는 너무나 살벌한 피냄새가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원죄처럼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 한국기독교입니다.

물론 가톨릭에도 그런 광기의 주홍글씨가 없을 수 없습니다. 굳이 나치스와 협력한 가톨릭의 전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이 운영하는 성모병원 곳곳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심지어는 용역깡패를 불러들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으로 진압할 때 십자군전쟁의 피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서로 다른 예수, 서로 다른 실천

같은 가톨릭이라고 해도 극과 극처럼 다른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 정신병동과도 같은 한국사회에서, 저는 한국의 보수 성직자란, 보수 신도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냄새를 풍기는 위장 성직자, 위장 신도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상관없는 멀쩡한 인민들을 빨갱이라고 몰아 죽이는 데 앞장선 신도들과 사제들, 그들이 과연 예수의 사랑을 말할 자격이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살인자 박정희를 칭송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신도들과 사제들을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해야 좋을지 어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예수와 정의구현사제단의 예수는 전혀 다른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제왕처럼 군림하는 특권층인 주교나 신부들의 예수와 길거리의 신부인 문정현 신부의 예수, 민들레 국수집의 예수는 전혀 다른 예수입니다. 강을 찢어발기고 대운하를 건설하겠다고 기도하는 이명박의 예수와 대운하를 반대하며 강을 순례하는 순례단의 예수는 전혀 다른 예수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이라크 인민들을 학살하면서 아침마다 주 예수를 찾는 부시의 그 예수와 학살된 이라크 인민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예수는 전혀 다른 예수입니다.

부산에서 도로시의 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예수를 저는 제 삶의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장가도 가지 않은 예수가 30대의 나이에 세상과 자연의 이치에 대해 깨닫고 행동에 옮긴 그 서사시를 아직도 저는 제 삶의 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와 붇다의 말씀이 그렇게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 붇다의 말씀 가운데는 당대의 사회 문화라는 배경에서 오늘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경전의 문구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므로 그저 그런 모양이다 하고 넘어가면 되니까 말입니다.

저는 사람을 숫자로 계산하는 우리 한국사회가 사람을 진정 사람으로 사랑하고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회로 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민들레 국수집, 도로시의 집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태일기념사업회의 한 모퉁이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전태일이 바로 예수였다고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전태일기념사업회도 다름아닌 민들레국수집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에서 나아가 실천을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준 사람들, <지금 여기> 사람들과 우리신학연구소 사람들, 천주교인권위 사람들,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 늘 따뜻한 호인수 신부님과 형님 먼저 동생 먼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 전종훈 신부님... 이들의 예수님을 저는 존경하고 제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승옥

1980년부터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을 역임했고, 1985년부터 90년까지
서울노동운동연합 정책실장, 구로노동상담소 상담간사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2005년부터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연구원을 맡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경기도 양평, 여주, 경북 김천 등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2005년 6월부터는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를 맡아,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풀뿌리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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