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김덕진]

용산 사람들.. (사진/한상봉 기자)

철거된 남일당, 철거된 기억

2010년 12월 1일 ‘남일당’이 철거됐다. 2009년 1월 20일 철거민 5인과 경찰특공대 1인의 생떼 같은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681일째, 철거민 5인의 장례를 치룬지 327일째, 대법원이 철거민들에게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 아버지를 용산참사에서 잃은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민세입자대책위원장에게 징역 5년이라는 중형을 확정한지 21일째 되는 날, 대한민국 재개발 잔혹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영원히 기록 될 용산참사의 현장 ‘남일당’이 사라졌다. 40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비워주고 힘없이 무너졌다. 한 시대가 ‘남일당’과 함께 지나가는 듯하다.

2009년 용산 ‘남일당’은 시대의 상징이었다. 이 나라의 허약한 민주주의가 매일 죽어가던 곳, 서민들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지던 곳이 바로 ‘남일당’이었다. 우리를 쫓아내려는 용역회사 직원들과 구청직원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서로 어깨를 걸고 무작정 주저앉아 버티던 곳, 현수막 한 장만 내걸어도 득달같이 달려와서 성능 좋은 확성기로 고함을 치며 방패를 들고 우리를 둘러싸던 민중의 지팡이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허리춤을 잡혀 질질 끌려가던 곳,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63번지 지하 1층, 지상 4층 금·은 귀금속 판매점 남일당이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 살구색 건물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2010년 12월 30일은 용산참사 대정부 협상 타결 1년이었고, 2011년 1월 9일은 용산참사 철거민 열사 5인의 장례를 치룬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2011년 1월 20일은 지금은 없어진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대한민국 재개발 잔혹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꼭 2년이 된다. 이제 용산참사는 이렇게 억지로 숫자들을 가져다 붙이며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기억될 수 있는 옛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홍대 앞 작은 용산 두리반의 투쟁이 1년이 넘었고, 성남 단대동에서, 일산 덕이에서, 서울 신계동과 상도동에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 천막치고, 노숙하며 “여기 사람이 있다”고 흐느끼는 사람들이 수백, 수천에 이르지만 남일당과 용산은 그렇게 우리들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다.

생존권 투쟁을 하는 이들 중 절박하지 않은 이들이 누가 있으랴. 100일 가까운 단식농성을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상징이 되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 77일간의 옥쇄 파업 기간 내내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며 평택 공장 정문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쌍용차 가족들, 정규직과 해고자복직을 위해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엠대우 노동자들, 모두 저마다의 비장한 사연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자본이라는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처럼 싸우고 있지 않은가?

40년 전 스물두살의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사르며 절규했던 요구가 하루 임금 150원 보장, 노동시간 12시간으로 축소, 그리고 매주 일요일에는 쉬게 해달라는 것 뿐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생존권을 걸고 투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바랐던 시절은 없다. ‘요구사항’이란 큼지막한 글씨를 쓰고 내용을 정리하고 읽어보면, ‘겨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기본적 요구들을 주장하며, 그렇게들 목숨을 걸며 싸움을 한다. 곁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깝다 못해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참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민중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걸고 투쟁에 나서도 너무나도 소박한 그 작은 바람조차 대부분 얻어내지 못하고 만다.

▲ 사진/김용길 기자

▲ 남일당 생명평화미사(사진/김용길 기자)

그러니 2년 전 겨울 용산 한강로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 망루를 세웠던 그들이 원했던 것 역시 대단한 것이었을 리가 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잊혀가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그들을 남일당 옥상에 불러모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절규라도 한번 외치게 해 보고 싶다. 아니면 내가 그들 대신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쫓겨나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소리 한번 지르고 싶다.

대학 학생회 간부라는 어줍지 않은 오만함이 내 어깨를 올라타고 있을 어린 시절부터 철거민들의 투쟁을 어깨너머로 보아왔다. 땀 흘리는 노동이라는 것은 해 본적이 없는 하얀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치 혀로 종종 혁명을 입에 올리며 잘난 체 하던 비루한 청년의 눈에, 철거민들의 투쟁은 너무나도 무모하고 과격해 보였다. 세월이 지나 인권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철거민들하고는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랄 정도로 철거민들은 답답하고 과격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년 동안 용산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철거민들을 겪어보니 내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용산에서 만난 그들은 그저 동네 전파사 형님이나 정육점 아저씨였고 포장마차 이모님이거나 시장 반찬가게 아주머니들이었다. 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게 하고, 용역회사 직원의 귀를 물어뜯게 만든 배후는 결국 더 많이 내쫓고 몰아내야 배가 부른 건설 자본이고, 그 자본과의 달콤한 밀애를 오랫동안 즐기고 싶은 이 땅의 권력,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내 옆집에 사는 것은 구질구질하고 짜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과 우리들이다.

여기 망루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용산참사 철거민 열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 고 이상림씨는 남일당 건물 바로 뒤 건물 1층에서 27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돼지갈비 장사를 했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기 18개월쯤 전에 막내아들 내외에게 돼지갈비집 자리를 물려주었고 막내아들 내외는 은행 대출을 받아 돼지갈비집을 호프집 ‘레아’로 다시 개업했다.

고 이상림씨는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나서 자신들을 거리로 내쫓은 장본인인 재개발 조합장이 장로로 있는 교회의 새벽 예배를 다녀와서는 매일 아침 흐뭇한 표정으로 ‘레아’ 앞 골목을 청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고 이상림씨가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살던 월세 방도 ‘레아’가 있던 건물 옥탑에 있었으니, 그는 재개발로 생계의 터전과 몸 뉘일 한평짜리 공간까지 잃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 이런 상황을 마주했다면 어떠했을까?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재산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겠는가?

고 이상림씨는 칠십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망루에 오르는 방법을 택했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까맣게 불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막내아들 이충연은 아버지와 함께 망루에 있다가 화재 후 뛰어내리면서 무릎인대가 파열되고 유독가스로 인한 폐 협착으로 입원해 있던 중 구속되어 징역 5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시어머니는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었고 며느리는 남편을 감옥에 보낸 한 집안의 이 기구한 불행이 과연 이들의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 사진/김용길 기자

고 양회성씨는 평생 횟집 조리장으로 일하며 모은 전 재산에 지인들에게 융통한 돈을 보태 용산에 복요리 전문점을 열었다. 장성한 두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식조리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온가족이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꿈을 꾸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었다. 이 단란한 꿈을 꾸고 있던 네 식구에게 갑작스런 철거소식은 평생 꾸어 왔던 꿈을 눈앞에서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조각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고 양회성씨는 평생 입었던 흰색의 조리사 옷 대신 파란우비를 입고 망루에 올랐다. “잠시 다녀오마” 하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만 아버지를 마음에 품고 고 양회성씨의 두 아들은 남영동에 일식 주점을 열었다. 아버지와 함께 꾸던 꿈을 두 형제가 시작한 것이다. 고 양회성씨는 이제 없지만 그의 넋이 종원이와 종민이 곁에서 함께 꿈을 이루게 되리라 믿는다.

고 윤용헌씨는 용산 4구역뿐만 아니라 타 지역 철거민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좋았다. 종로구 순화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던 고 윤용헌씨는 특유의 친절함으로 한번 온 손님은 꼭 단골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던 식당이 재개발로 철거될 위기를 맞자 그는 철거민 단체에 가입했고 자신 말고도 억울하게 쫓겨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철거민 단체에 가입한 후, 그는 전국 어디든 철거민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큰 소리 한번 한 적 없고, 철거민들의 온갖 궂은일도 도맡아서 묵묵히 일하던 든든한 오라버니이자 형님이었다. 지금은 군인이 된 간 큰 아들 현구, 착하고 어른스러운 막내 상필이와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가장 좋아했던 고 윤용헌씨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의 투쟁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와 연대하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일이지만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의 싸움이 곧 자신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역시 이토록 가슴 아픈 죽음으로 가족들과 이별 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투쟁이 정당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 한대성씨는 조용한 분이었지만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다정다감하게 말을 건 내는 방법을 몰랐지만 큰 아들이 입대하는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따뜻한 아버지였고, 20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도 걱정스런 표정 한번 짓지 않고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 준 든든한 남편이었다. 수원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있는 작은 마을 신동에 마련한 작은 보금자리에서 분당선 연장구간 공사로 인해 쫓겨나게 되자 이웃들과 함께 투쟁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고향 강원도로 돌아가서 감자밭 일구며 살자고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눈을 감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고 이성수씨는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13년 전 용인 수지에서 재개발에 의해 쫓겨난 경험이 있었던 고 이성수씨는 두 번째도 힘없이 쫓겨날 수는 없다고 아내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노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살던 집은 또 강제철거를 당했고 그날부터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살던 집을 강제로 철거당한 사람의 심정을 난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자신도 힘들게 투쟁하면서 다른 지역 연대하는 일은 늘 최우선이었던 고 이성수씨, 같이 농성을 하던 이웃들이 하나둘 동네를 떠나도 투쟁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았던 그도 두 아들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서는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용산참사 이후, 아들 둘을 모두 군대에 보낸 고 이성수씨 부인은 얼마 전 용인에 빈대떡집을 열었다. 시끌벅적하고 믿음직했던 집안 남자 셋을 순식간에 다 떠나보낸 고 이성수씨 부인은 바쁘게라도 살지 않으면 못살 것 같아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두 아들이 전역하면 좀 더 큰 가게를 열 수 있도록 그동안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는 2009년 10월 26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번 단식에는 이수호(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조희주(노동전선 대표), 정종권(진보신당 부대표), 이강실(한국진보연대 대표), 남경남(전철연 의장), 이종회(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박래군(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등 7명이 참가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지긋지긋한 슬픔

이충연 징역 5년, 김주환 징역 5년, 김창수 징역 4년, 천주석 징역 4년, 김재호 징역 4년, 김대원 징역 4년 용산참사로 구속된 철거민들의 형량을 합치면 징역 26년. 여기에 전국철거민엽합 의장 남경남에게 선고된 형량 징역 5년과 이미 만기로 출소한 2명의 전국철거민연합 간부의 형량 1년과 1년 6월을 보태면 용산참사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형량만 합해도 33년 6개월이 된다. 불구속으로 재판을 진행 중인 농성 철거민들이 열 일곱명이나 있고, 수원 신동의 철거민 한분은 재판에 다녀온 직후 잠을 자다 사망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여기에 이후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의 형량까지 합치면 모두 100년은 넘을 것이다. 수백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으니 용산참사와 용산참사 이후 추모집회 등으로 전과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남의 것을 빼앗지도, 남을 속이거나,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것을 지키려다가 너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추모하고 그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감옥이고 벌금납부 고지서다. 추모하는 따뜻한 마음과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의 대가가 생각보다 참으로 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권활동가이자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인 박래군에게 검찰은 징역 5년 4월을 구형했다.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과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10개월의 수배생활을 한 후, 자진 출두하여 옥살이를 하다 보석으로 석방된 박래군에게 검찰은 검찰이 구형할 수 있는 최대의 형량을 선물했다. 긴 세월 인권활동을 하며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껴안으려 노력해 온 인권활동가이자, 두 딸의 자랑스런 아버지는 21세기에 들어서서 벌써 세 번째 감옥을 준비 하고 있다. 분노의 눈물도 이젠 말라버렸다.

용산참사 발생이후,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은 ‘용산’이란 말만 붙으면 눈에 불을 켰다.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고 조금만 관련이 있다 싶으면 모두 서초동 검찰청으로, 용산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한 철거민 단체 간부 중학생 아들의 은행 계좌 거래내역을 뒤지기도 했고, 온 집안 식구의 통화 내역을 다 추적했다. 구속된 철거민들의 접견 기록이나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신 내용도 검열하여 말꼬리를 잡아 법정에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실력과 정성으로 정치인들의 뇌물수수 사건이나, 재벌들의 불법상속 사건을 수사했으면 아마 대한민국 검찰은 온 국민이 사랑과 신뢰를 받는 조직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도 용산참사 장례식 날의 일로 장례식 9개월 이후 소환 조사를 받는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수사기관의 그 성실한 노력이 참으로 가상해서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용산범대위가 개최하고자 했던 모든 집회의 집회신고를 단 한건도 받아주지 않았던 경찰이, 그래서 미신고 집회가 되어버린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우리들을 불러다가 다시 법정에 세운다. 참으로 지겹다, 이 땅의 공권력.

‘민족의 명절 설을 앞에 둔 2009년 1월 20일 용산 국제빌딩 옆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워진 철탑 망루에서 철거민 다섯과 경찰 한 명이 경찰의 무리한 강제진압 과정에서 죽었다’는 이 한 문장은 2010년 1월 9일 다섯 철거민의 장례를 치룰 때까지 1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어온 나라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장례 후 1년이 지난 2011년, 용산참사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2010년 한해 동안 사람들의 눈과 귀는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한반도의 긴장상황과 온 국토를 병들게 하는 4대강 삽질과 국회의 날치기 예산안 통과, 남아공 월드컵과 지방선거 등에 쏠려 있었다. 대법원의 최종 선고 소식도 배추 가격이나 5,000원짜리 ‘통큰치킨’ 보다 관심 있는 뉴스가 아니었고, 남일당 건물 철거 역시 15초짜리 단신보도로 처리 되었다. 이제 용산참사는 철거 위기에 놓인 홍대 앞 칼국수집 두리반을 작은 용산이라고 부를 때나 기억되는 정도일까?

하지만 원래 살던 주민들을 쫓아내고 집이라는 존재를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으로 만든 이 땅의 건설자본들과 그 자본의 손을 잡고 모든 편의를 제공한 이 땅의 권력이 함께,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던 여섯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실, 아니 여섯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절대 잊혀져선 안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산참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더욱 줄어들겠지만 뼈를 깎고 살을 찢을 듯 매섭게 추웠던 2009년 겨울 새벽 용산에서 있었던 '죽음'과 '죽임'을 우리들의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으리라.

▲ 사진/김용길 기자

가려진 진실, 기록되는 거짓말

누가 나에게 2010년에 가장 어이없었던 뉴스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지난 여름 정운찬 전 총리가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임기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용산참사 해결이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꼽을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용산참사를 잘 해결했으니 이제 재개발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잘 해나가자고 떠들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에 주목을 받는 명망가들은 이렇게 말 한마디로 자신의 업적을 쌓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허탈한 웃음만이 새어 나왔다. 정운찬 전 총리가 해결을 했다니. 정운찬 전 총리의 총리 임기 중에 용산철거민 열사들 장례를 치룬 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말을 하는 걸까? 정운찬 전 총리를 다시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말이다. 혹시 정말 자신이 해결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면, 그가 더 이상 국무총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이다.

필자는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용산 4구역 철거민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 받아 대정부 협상을 담당했던 협상 대표였다. 물론 지금도 그때 협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불찰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협상에 나섰을 것이다.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시작하는 협상이란 것은 잘해도 못해도 욕을 먹기 마련이지만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비장한 각오로 협상을 기다렸지만 용산참사가 발생하고 6개월이 지날 때까지 난 협상대표의 이름값을 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어느 기관에서도 '용산'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는 용산을 외면했다. 국민 여섯이 목숨을 잃은 이 엄청난 비극을 대하는 정부의 무심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우리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난 협상대표로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불안은 내 기우였다. 기다리면 이기는 싸움이라고 조급해 말라던 문정현 신부의 말처럼 여름이 본격화 되면서 정부관계자들은 앞을 다투어 용산을 찾기 시작했다. 60여 차례의 공식, 비공식 테이블에서 경찰과 용산구청, 서울시청, 총리실과 정보기관 사람들을 만났다. 이후 용산은 신임 국무총리의 조문도 받았고 서울시장도 만났다. 야당의 대표들과 중견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자신이 용산참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천주교 주교 등 대표적인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용산을 찾았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 우리의 진심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서글픈 진실이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용역회사 직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조석으로 듣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에게 팔이 꺾이고 뒷덜미를 붙잡혀 아스팔트 위를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용산을 떠나지 못했던 우리들의 마음, 단 한 번도 우리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었던 민중의 지팡이에게 얻어터지고, 이유 없이 잡혀가고, 온갖 협박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 찬 바닥에 앉아 미사에 참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들의 진심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실 그저 용산에 잠시 들렀다 가는 이들에게 우리의 진심까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가 있던 날, 남일당 앞에서 유족과 함께 하던 강정근 신부가 경찰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사진/정의구현전국사제단)

▲ 용산참사현장에서 2009년 6월 20일 범국민 추모제를 하면서 전종훈 신부 등 몇 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실신하고, 경찰에게 얻어맞고, 유가족들이 실신해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렇게 어렵게 집회를 마치고 미사도 중단된 상태에서 다음날인 21일 일요일 오전에 다시 관악방범순찰대가 들이닥쳐 범대위 농성장과 사제단 단식기도장을 침탈했다. 이 과정에서 천막에 부착한 현수막이 철거되고 이강서 신부 등 사제들의 옷이 찢기고 부상을 당했다.(사진/한상봉 기자)

용산참사는 누구 한사람이 해결한 일이 결코 아니다. 누구 한사람이 해결 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총리가, 서울시장이 해결한 일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1년을 하루처럼 살아올 수 있었던 힘, 실타래처럼 꼬인 용산참사를 해결한 것은 바로 '사람'의 힘이었다. 1년 동안 용산을 기억하고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 천막을 치고 매일 기도하며 용산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들, 남일당에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던 사람들, 초를 들고 꽃을 들고 쌀과 라면을 들고 김치와 과일을 들고 용산을 찾아왔던 사람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1년을 살았고 장례를 치루었다. 그 힘으로 지금도 ‘용산’의 기억을 붙잡고 영화를 만들고, 투쟁 백서를 만들고, 철거민들과 연대하여 투쟁하고 있다.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허락된 지면을 다 채우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희망,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이렇게 신명나고 훈훈하게 투쟁해도 돌아가신 분들께 누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 정도로, 매일매일 우리를 눈물 흘리게 했던 사람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던 사람들,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사람들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 힘에 비하면 난 얼마나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는가?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새삼 목이 메이고 눈이 뜨겁다.

협상이 타결된 후 어떤 보수 신문이 쓴 기사처럼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과연 '돈'이었다면 우리는 훨씬 빨리 장례를 치룰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우리가 돌아가신 그분들의 '목숨'을 감히 '돈'으로 보상받으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 1년 동안 상복을 벗지 못한 유가족들의 한과 눈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노숙을 하며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 온 철거민들의 매일매일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협상에 임했다.

용산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협상에서 우리가 어찌 ‘돈’을 이유로 1년을 끌어 올 수 있었겠는가? 최소한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와 임시상가, 임대상가를 보장 받아야 했다. 세입자들의 주거안정과 권리침해를 막을 수 있는 ‘순환식 개발’이 보장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야 다섯 분의 ‘목숨 값’을 1%라도 받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간 다섯 분을 냉동고에 모셔두면서까지 유족들과 우리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었던 용산의 ‘부족한 승리’였다.

▲ 2010년 12월 1일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 건물이 철거됐다.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 제도개선 위원회’(진상규명위)는 이날 오전 8시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또 다른 용산참사를 막아내겠다”고 밝혔다.(사진/고동주 기자)

뒷 걸음 치는 세상

협상과 관련한 약속들이 하나둘 이행되며 우리는 남일당을 떠났다. 하루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 남일당을 떠나는 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마지막 날에는 서러움과 그리움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197번의 생명평화 미사가 열렸고, 100회가 넘는 촛불집회를 열었던 곳, 1천끼가 넘는 밥을 지어 먹고 돗자리 한 겹을 바닥에 깔고 371일이나 잠을 잤던 곳, 단 한순간도 초가 꺼지지 않았고 조문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던 그곳을 떠나는 날 우리는 참 많이 울었다. 용산을 떠나는 것은 용산을 잊기 위함이 아니라 용산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용산참사를 해결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떠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칭했다. 용산에 마음을 두고, 혼을 두고 떠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남일당을 떠나고 1년 동안 세상은 더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이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정부를 꾸짖지도 못했고 하루하루 힘들어지는 서민들의 불안한 생존권은 점점 더 곤두박직치고 있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머리에 띠를 두르지 않고는 목소리 한번 내기가 어렵다. 겨울이 다가오면 노숙농성장에 불어올 겨울바람보다 혹한기에 들어가기 전 철거를 끝내려고 달려들 포크레인 걱정에 밤을 지샌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2년전 용산참사 때 보다 지나온 시간만큼 뒤로 돌아갔다. 아니 사실 그 짧은 시간에 무너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정권의 눈치만 보며 인권의 원칙을 외면하고 있고, 굴욕적으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부당한 한미 FTA를 국민합의 없이 타결했다. 휴전선 북쪽의 동포들을 겁박하려고 다른 나라의 원자력 항공모함을 서해앞바다에 띄워놓고 뿌듯해하며 전투기 폭격 운운하는 국방장관이 임명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투쟁하다가 감옥에 간다. 동성애자들과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고 신문에 광고를 내는 비뚤어진 믿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백년 지 악재(惡材)’가 될 것이 분명한 4대강 죽이기 토목공사를 녹색성장이라 우기며 필요한 예산은 날치기로 국회를 통과 시킨다. 외국 정상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제 나라 국민들을 뒷골목으로 내쫓고, G20 포스터에 쥐 한마리를 그렸다고 법정에 서야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립 공사 수주의 대가로 젊은 군인들을 중동의 사막으로 파병하는 2011년 대한민국에서 과연 우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 가톨릭교회의 사제들 200여명이 서울 용산참사 현장에서 비상시국미사를 열고 <천주교사제 1,178인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사진/한상봉 기자)

국가권력이 국민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국가권력은 부당한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기 시작한다. 그 심각한 인권침해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신속하기 마련이다. 권력은 자신의 말과 행동만이 진리이고, 자신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지몽매한 한줌밖에 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없이 무시하고 끝없이 찍어 누르기 마련이다. 물론 국가권력이 국민의 목소리를 우습게 알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데에는 분명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다. 우리가 믿었던 민주주의와 인권이 이토록 쉽고 빠르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고, 경제 살리기와 뉴타운개발 거짓동화에 깜빡 속아 있었던 우리의 책임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거스르는 국가권력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보고 싶지 않다면,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능멸하지 않는 정권을 보고 싶다면, 더 이상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국민을 보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믿을 것은 다시 국민의 힘뿐이다. 우리 모두의 ‘행동하는 양심’뿐이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고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고통과 투쟁의 세월만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난 3년간 분명하게 체험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무관심과 방조가 얼마나 커다란 잘못인가를 온몸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2009년 용산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염원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 애틋하고 갸륵했던 마음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남일당’은 무너지고 저들이 쌓아 올리는 바벨탑만이 서울시내의 마천루를 가득 채우겠지만, 우리에겐 그 주상복합건물들 보다 더 높은 의지가 있고 꼭대기 층 스위트룸 보다 더 넓은 마음이 있지 않은가? 다시는 국민이 공권력에 의해 죽게 하지 말자, 다시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나지 말자. 2009년 1월 20일 용산을 잊지 말자. 이 비장한 다짐들이 희망이 되고 신념이 되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킬 것이라 믿는다. 포기하지 말고 흔들리지도 말자. 우리는 좋은 몫을 택해 옳은 길을 가고 있다.

* 녹색평론 116호에 실린 필자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김덕진 /사단법인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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