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양적 성공이 우려스러운 이유

 천주교회로 교적을 바꾸는 개신교도가 부쩍 늘어났다는 추정적 사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분석적 논의를 진전시키기엔 자료의 빈곤이 너무 심각하지만, 대체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사회적 이미지가 그러한 변동의 한 요소로 작동하였을 것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사회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는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최근 천주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는 한결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한 이미지 전환의 배경이 되었을까?

 이것 역시 복잡하다. 그렇지만 개신교의 자폐적이고 공세적인 존재 양식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천주교회에 대한 사회의 호의적 평가가 반영된 것이라는 관점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이것은 개신교회를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보는 일반적인 시선과 맞물린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는 한국 최대 종단인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종교의 지평에서 동시대적 합리성과 가장 잘 부합하는 종단은 천주교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는 민주적 제도화의 흐름이 보다 뚜렷해진 1990년대 이후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개체의 자존성이 급격하게 강화되는 추세에 있는데, 이 점은 일단의 신자들이 개신교를 이탈하는 현상의 사회구성적 배경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로 옮겨갔을 것이라는 추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개발주의적 총력전 체제로 성공한 개신교, 그러나

 지난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 전반기까지 지속됐던 개발주의적 총력전 시대에 개신교의 대부흥/양적폭발 현상이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 신앙은 개발주의적 총력전 체제와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성공(양적 성장)을 위해 모든 가용 자원을 집중투여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됐고, 종교적 보상체계 또한 이러한 성공의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된 신앙 담론이 개신교회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민주적 제도화로의 급속한 사회적 이행은 개신교의 제도화 양식을 불편해하는 사회적 감수성을 강화시켰다. 개신교의 성공주의적 총력전 신앙이 삶의 미학을 발전시키지 못한 탓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호들갑스럽고 양적 성과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전체주의적 신앙양식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상당수가 천주교로 교적 이동을 단행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적 추정이 가능하다면 최근 천주교회의 교세가 확대되는 주된 요인은 개신교의 신앙제도가 가진 시대착오적 특성으로 인한 제도적 통합의 실패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천주교회의 사회적 존재 가치가 높게 평가받은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천주교, 평신도 지도력에 대한 교권의 압박

 그런데 최근 천주교회는 시민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잠식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성직자들 일부가 비교적 활발하게 시민사회적 의제에 개입하고 있을 뿐, 지난 시기 천주교적 시민성의 축을 이루고 있던 평신도 엘리트들의 활동은 퍽 미미한 상황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평신도 지도력에 대한 교권의 압박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외부자로서 이러한 교권에 의한 압박의 이유를 충분히 알 길은 없지만, 개신교가 그랬던 것처럼 천주교회 또한 사회적 존재 가치를 격상시킬 기회를 교회 스스로가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천주교의 성장, 개신교의 실패가 낳은 우연의 효과일수도

 또한 최근 천주교회의 냉담자율이 상당히 높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것은 천주교회가 신자들의 제도적 통합에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도의 천주교로의 교적 이동은 천주교의 신앙제도의 성공의 결과라기보다는 실패가 낳은 우연의 산물일 수 있다. 즉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체적 자존성에 대한 의식이 향상된 개신교 신자들이 개신교 교회들의 과도한 전체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워보이는 천주교의 이미지에 호감을 느낀 결과 교적 이동을 수행했다면, 천주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상당부분은 천주교회의 신자들에 대한 제도적 통합의 실패가 낳은 우연의 효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최근의 교세 확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제도적 통합을 향상시킬 내적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또 사회적 존재가치의 하락을 막을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냉담자율을 줄이기 위해 신앙제도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모색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미 천주교회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지난 시절 개신교의 성과주의적 전략을 답습하는 것이다. 양적 성공을 신앙의 핵심적 가치로 격상시키고, 그것을 위해 다른 요소들을 도구화하는 방식의 신앙의 제도화가 촉진된다면 그것은 단기적인 성공을 낳을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교세의 위기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나타나는 흔한 양상은 신앙을 양적 척도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결과, 즉 교세가 위축될 뿐 아니라, 지금 어느 정도 확보한 듯이 보이는 교양 있는 신앙적 삶의 양식조차도 상실할 수 있다.

 난해한 방식의 설명을 난삽하게 늘어놓았다. 그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종단을 향해 고언해야 하는 지면에 대한 나의 심적 부담이 그만큼 깊은 탓이다. 그럴 만한 품격이나 지식이 내게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개신교의 실패를 천주교가 답습할까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겠다. 거기에 교권을 민주화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딘 천주교의 내적 특성이 기회를 스스로 잠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문제제기를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것이겠다. 그렇지만 글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나의 추정과 분석이 허튼 소리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진호 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