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박영대]

김진호 목사가 1월 11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 살처분된 100만 마리 소와 돼지를 위해 종교인들이 모여 애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제안을 내가 했다고 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지난 1월 5일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들이 모여 새해 연구 과제를 생각해보는 워크숍을 했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엄기호 연구위원이 그 같은 제안을 했다.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끔 시대 흐름에 맞는 제안을 하곤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참여불교재가연대 정웅기 사무총장에게 문자로 ‘혹시 불교에서 살처분되는 짐승을 위한 천도재’가 올려지는지를 여쭈었다. 몇몇 사찰에서 천도재를 올리고 있다며 그렇지 않아도 이웃 종교와 함께 뭔가 해야 하지 않겠나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다. 마침 다음날 김진호 목사와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니, 함께 의논할 수 있는 분을 보내시겠다고 했다.

▲ 한 스님이 구제욕으로 살처분된 짐승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고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김진호 목사의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참여불교재가연대, 우리신학연구소는 몇 년 전부터 ‘개혁을 위한 종교인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꼴로 회의도 하고, 공동 포럼이나 연대 사업을 해마다 몇 차례씩 꾸준히 해오고 있다. 다음날 만났을 때 내가 제안 설명을 하다보니, 마치 내가 처음 제안한 것처럼 되고 말았다. 사실 엄기호 연구위원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구체 제안은 참여불교재가연대 정웅기 사무총장이 하셨는데.

따지고 보면 ‘개혁을 위한 종교인네트워크’도 옆구리 찔려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2004년의 일로 기억한다. 그 무렵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보수 개신교 신자들은 시청 광장에 모여 성조기를 휘날리며 국가보안법 존치를 주장하였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보다 못해 상지대 김정란 교수가 스스로를 ‘예수쟁이’로 규정하며 “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당연히 보수 개신교 신자들이 들고 일어나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그때 우리신학연구소 설립 때 참여했던 친구 이대훈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신학연구소도 나서서 김정란 교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해보니 진보 개신교 연구소와 함께 하면 좋을 것 같고, 더 나아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일 게 아니라 각 종교 내부와 사회 개혁을 위한 범종교 상설 네트워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 차례 준비모임 끝에 만들어진 게 ‘개혁을 위한 종교인네트워크’였다. 이 비슷한 연대모임이 그 몇 년 전에도 생겼다가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를 교훈 삼아 몸집을 불리지 않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에서 1개 단체씩만 간사 단체 격으로 긴밀히 만나다가 필요에 따라 연대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그로부터 6~7년 시간이 흐르면서 3개 단체는 이웃을 넘어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지금도 그분들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객쩍게 옆구리 찔려 일을 도모한 얘기를 늘어놓는 건, 거룩하게 얘기해서 혹시 이런 게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 싶어서다. 오래 전에 신앙인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바가바드기타 강좌를 들은 일이 있다. 이현주 목사가 가르치셨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강좌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중심인 단체에서 마련한 강좌에서 개신교 목사가 힌두교 경전을 가르쳤으니 종교다원주의의 극치였다. 이때 강의 내용은 <쉽게 풀어 읽는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강의 내용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 명주실로 이끄신다는 말씀이다. 가느다란 명주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내가 안 움직이면 금방 끊어지고 만다. 그러니 하느님 이끄심대로 살려면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살펴서 그 이끄심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안 그러면 당장 명주실이 끊어진다. 늘 하느님과 대화하며 그 뜻을 살피는 분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나 같이 얼치기 신자는 꿈도 못 꿀 경지이다. 나 같은 하수는 와서 옆구리를 찔러야 그때야 움직인다. 옆구리를 찔려도 아예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귀찮아서 모르는 척 할 때도 많을 것이다.

둔하디 둔한 나에게 다가와서 내 옆구리를 찔러 준 엄기호와 이대훈, 그래서 내 정신이 버쩍 나게 해준 그들이 나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일깨우는 성령의 역사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느님은,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들 서로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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