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사토라레サトラレ, 감독 모토히로 카츠유키, 2001년

독심술이라 해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은데, 만약 자신의 마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영화는 정작 자기자신은 모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자신의 마음이 타인에게 읽힌다는 발상이 재미있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사람을 '사토라레'라고 한다. 이들은 국가재산으로 규정되어 군과 정부의 보호 속에서 관리되는데, 대부분 아이큐 180 이상의 천재들로 일본의 국가적 이익에 크게 기여한다. 단 자신들이 사토라레라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속마음이 타인에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자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현재 7명의 사토라레가 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이들은 ‘특능보존위원회’이라는 국가조직의 통제하에 일본 곳곳에서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 사토라레는 인간을 자원화하는 양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능력을 갖춘 개인이 공동체나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기에 인재를 양성하고 충분히 지원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도태시킨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근대국가의 세련된 폭력성을 우리 대부분은 이미 몸소 체험한 바 있다. 그 능력이라는 것도 충분히 검증되었고 공정한지에 대해서도 의심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사토라레도 만약 국가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분명 가차없이 버려졌을 것이다.

비행기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 이 아이는 구조되면서부터 사토라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훗날 청년이 된 이 아이 사토라레 ‘케이스 7’ 사토미 켄이치, 그리고 그를 관리․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정신과 의사 출신의 여군 코마츠 요코. 켄이치는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와 산다. 그 역시 자신이 사토라레라는 것을 모르면서 잘살아왔다. 물론 위원회에서 파견된 직원들의 감시를 받아왔고, 대학입시도 혼자만 봐야 했다. 의대를 수석으로 합격해 무사히 마치고 병원에 들어갔으나 사토라레인 그에게 위중한 환자를 맡길 리 없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 해도 맺어지기 힘들다. 마을사람 모두에게 기이하고 성가신 존재인 켄이치지만 할머니에게는 ‘목소리가 크고 정직한 아이’일 뿐이다.

그 마을은 켄이치를 감내하는 불편에 대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는다. 켄이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마치 <트루먼 쇼>를 연상케 한다. 한 개인을 둘러싼 집단적 연기와 해프닝은 상당한 유사점을 보여주는데, 단 <트루먼 쇼>의 짐 캐리가 자본과 방송에 둘러싸여 있다면, 켄이치는 국가권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차이겠다.

▲ 인근 마을의 축제를 구경하러 가는 켄이치 일행. 켄이치를 둘러싼 모든 공간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연극무대와 같다.

요코는 직업적 업무의 수행과 관심 등으로 켄이치를 지켜보았으나, 점차 그에게 연민과 호감을 갖게 되고, 켄이치에게 가해지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통제에 맞서기도 한다. 하여튼 할머니의 암수술을 계기로 켄이치에게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사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액면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남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고,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하얀 거짓말’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토라레가 되고 싶어질 때도 있겠다. 가령 고백의 언어가 그렇다. 눈짓, 몸짓은 이미 충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이내 미심쩍을 때에 말을 요구한다. 80년대 인기가수 해바라기의 한 노래가사처럼 “어서 말을 해”라고. 그러나 그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리는 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 말이 가슴 설레게 하는 그이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 켄이치에게는 어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영화는 사토라레의 비극성을 이야기하지만, 더 나아가 인간들이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잃게 되는 마음의 문제를 더듬어간다. 인간은 ‘호모에렉투스’로 진화하면서, 그러니까 우뚝 일어서면서 손을 쓰게 되고 목이 들려 발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직립의 선물인 언어 때문에 인간은 많은 일들을 하였고, 언어는 인간행위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언어는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분명 많은 한계가 있다. 언어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마음과 미끄러지게 되고, 인간사의 많은 고통과 불행도 그런 미끄러짐에서 비롯된다. 요코는 사토라레라는 운명에게 주어진 연민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한계를 자신의 보고서 속에서 밝힌다.

“요즘 시대는 말로써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리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일이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런 시대가 사토라레를 태어나게 하는지도…. 우리 모두가 사토라레를 보통사람처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면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맞았겠죠.”

 

▲ 요코에게 켄이치는 더 이상 관찰과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사의 ‘약한 고리’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메신저가 된다.

사토라레를 둘러싼 여러 풍경들이 섬세하고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고 더 나아가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는 인간사의 매 순간 부딪히는 말과 마음의 문제에 너무도 절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꽉 닫혀 있고 언어에 지쳤을 때에 말을 걸어올 만한 영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