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가톨릭교회

“당신은 떡과 잔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결례되는 짓을 한 것 같다. 이십여 년 전 어느 날, 개신교회 전도사였던 나는 청년회장과 함께 개신교회 예배 대신 천주교회의 주일미사에 참석했다. 영세를 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나에게는 개신교에서 받은 세례가 바로 영세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성호를 긋고 예식을 주관하는 신부님에게서 떡과 잔을 받았다. 그러나 함께 갔던 청년회장이 성호를 긋지 않고 떡을 받아 문제가 되었다. 영세를 받았느냐는 신부님의 질문에 “개신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자, 신부님은 떡을 거두시며 “영세를 받지 않은 사람은 떡과 잔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 서늘해지는 긴장을 느꼈지만 성체는 이미 내 몸 안에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은 나에게 가톨릭과 개신교는 형제이며 하나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어울림 한마당, 담배 피는 신부님, 술 마시는 청년들

 이 일도 20년쯤 된 것 같다. 서울 숭의여자중학교 교목으로 근무하던 내가 여름방학을 맞아 아내의 친정집이 있는 안성의 조그만 시골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마을에 한 무리의 명동성당 청년들이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왔다.

 봉사활동 중이던 몇몇 청년들이 새마을 지도자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양쪽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청년들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농촌봉사활동에 정치적인 색채가 끼어들 것을 염려한 새마을 지도자가 초장에 기선을 제압하려 한 모양이다.

 성격 급한 내가 끼어들어 새마을 지도자와 설전을 벌였고, 청년들이 순수한 농촌 일손 돕기 활동에 그치는 한, 방해를 하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그 날 저녁, 청년들의 초청을 받았다. 마을 어르신들과 어울림 한마당을 하는데 와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청년들은 음식을 차려놓고 막걸리를 돌리며 마을 어른들과 어울렸다. 청년들을 인솔해 오셨다는 신부님은 연신 담배를 피우며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담고 있었다. 춤과 노래로 어우러진 그 날의 어울림 한마당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부러움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꼈다.

 개신교회에서는 이런 어울림이 불가능한 것일까? 술, 담배, 가무, 개신교회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그 모든 것들을 거리낌 없이 담아내는 가톨릭의 호쾌함이 한없이 부러웠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형제인가, 이웃인가, 남남인가?

 이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부담스러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이 없지 않다.

 특정종교에 속해 있는 사람이 다른 이웃종교에 대해 말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스런 일인가? 아무리 잘해야 본전 아닌가! 오랫동안 개신교에 몸담고 있던 내가 가톨릭에 대해 무얼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른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요즘에는 다른 종교 혹은 타종교라는 말보다 이웃종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가톨릭과 개신교가 이웃종교일까? 가장 적절한 말은 ‘형제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을 형제는커녕 이단, 혹은 사탄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아직도 많다. 그러면 가톨릭은? 가톨릭은 개신교회를 무어라 하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했지만, 비록 분리되어 있기는 해도 ‘우리의 형제’라는 의식을 정말로 갖고는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사제는 아버지인가?

 가톨릭 교인들은 자식뻘 되는 신부에게도 꼬박 아버지(Father, 신부)라 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고 가르치듯이, 신부님도 ‘신앙의 아버지’로 책임을 다하여 교우들을 돌보고 가르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매사에 의심이 많고 삐딱이 기질이 있는 내 눈에는, 순수한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늘 궁금증이 남아있다.

 오랫동안 ‘목회자는 곧 종놈’이라는 생각을 해 온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교우들 위에 군림하여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종놈이 종님이 되어 주인의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발칙한 짓이 아닐까?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건 필수사항이라 할 만하지만, 종(놈이 아니라 님?)에게 순종하는 것도 필수사항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혹시 목사는 종놈이기에 그래선 안 되지만 신부는 ‘아버지’이기에 괜찮은 것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개신교의 태동을 알린 종교개혁(이 말도 건방진 말 같다. 그리스도교만 종교라는 말처럼 들린다. 교회개혁이라는 말이 더 타당할 것 같다)이라는 것이 개혁(Reformation)이다 변형(Deformation)이다 말이 많지만, 어쨌든 개신교 정신의 중심이라는 ‘만인사제설’에 깊이 동의하는 나는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볼 때마다 몹시 당황스럽고 민망하다.

 교우들에게 반말을 찍찍 하거나, 황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나이 많은 교우에게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훈계하는 젊은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교황님, 정말이십니까?

 개신교인들이 길거리에서 “예천불지(예수천국 불신지옥)”를 외치고 다닐 때, 가톨릭은 나의 도피처였다. “우리 집안(기독교) 사람들이 다 그렇게 무식하진 않다. 우리 형(가톨릭)을 보라, 교황님을 보라. 전 세계의 양심이라 할 만 하지 않냐?” 개신교인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가톨릭은 그렇게 나에게 도피처가 되었고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형은 동생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동생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뭐, 이런 말을 하면 “우리가 어째서 동생이냐?”고 길길이 뛰는 개신교인들도 많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제 나에겐 핑계거리도 없어졌다. 새로운 교황님이 보위(?)에 오르시면서 내 희망도 자부심도 여지없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여전히 믿는 가톨릭 교인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교황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한 게 사실이다.

 새 교황님은 내가 존경했던 이전의 교황님들보다는 흑백논리에 젖어있는 미국의 대통령을 더 닮으신 것 같다.

/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실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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