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트의 러셀의 『행복의 정복』(사회평론사, 2004)

버트란트 러셀은 독특한 사람이다. 살기도 오래 살았고 그 긴 생애 동안 온갖 것에 관심을 쏟으면서 책도 참 많이 썼다. 고등학교 때 동네에 있는 ‘이어도’라는 사회과학 서점에서 그가 썼던 『종교는 필요한가(Why I’m not christian)』라는 책을 조금 보다가 덮어 버렸다. 가뜩이나 미약하기 그지없는 나의 신앙심을 흔들기에 충분한 내용들이 가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서라는 것을 최초로 개발한 가톨릭 당국도 아마 그런 심정으로 전율을 느끼면서 금서를 지정했으리라 싶다. 그로부터 십수 년 지난 최근에 그 책을 읽었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진화론을 택하고 신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멀리한 뒤에 참으로 마음이 편했노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 부분을 크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 문명이 기존 서구문명의 종합체로서 형성되는 모습과 여러 폐단을 날카롭게 까는 장면은 충분히 공감했다. 그리스도인이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버트란트 러셀 경이 행복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한겨레》에서 “아깝다 이책”인가 하는 란에 실리기도 했는데, 버트란트의 러셀의 『행복의 정복』(사회평론사, 2004)이 러셀 경의 행복론이다. 정복이라는 표현은 조금 그런데 굳이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정복이라는 것이다.

러셀은 말한다. 한때 사는 게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는데, 살아갈수록 그렇지 않더라.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더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없는데 기를 쓰고 힘들게 사려는 모습들을 하나씩 파헤친다. 그러면서 일상의 작은 것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들을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부분은 세상 온갖 것에 대한 관심이 행복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취미를 개발함으로써 행복에 다가설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한편 드는 생각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벅찬 이들에게 일상에 대한 관심과 취미의 개발이 그리 녹녹치 만은 아니하니 사회적 환경도 들여다 봐야 할 듯하다.

러셀 경은 행복해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면서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가지 것들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것도 아주 쉬운 글로. 어쩌면 사람들이 애써 피하는 면도 있다고. 갑자기 민주노동당이 브라질 노동자당의 것을 흉내낸 선거구호가 떠오른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예전에 보았던 만화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꽤 우울하게 사는 것 같은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개발한다. ‘다행찾기 놀이’던가. 하여튼 지금 내가 이래서 조금 꿀꿀한데, 그래도 이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뭐 그런 식으로 그리 불행하지만은 않은 자신을 발견하는 게임이었는데. 러셀 경의 생각과 연결한다면 마음먹기가 참 중요한 것일진데, 살아가면서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 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직장이나 가정 등등 자신을 둘러싼 여러 것들과 맞물려 참 되는 일은 없고, 산 넘어 산이라고 무언가 대책없는 일들이 계속 생겨날테고. 솔직히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편한해졌다. 어느 한 구절이 갑자기 머리끝을 찌릿하게 하면서 나를 들여다보게도 하고, 아 이것 딱 나 같은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짜릿한 구절들이 많았는데, 특히 내게 말하는 것과 같은 구절이 있어 한 구절 적어본다. 요즘 행복에 대해 고심하는 분들 이 책 한번 읽어볼 만함.

진정으로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너무 몰두해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갉아먹게 놓아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p.253)

만약 이들이 사소한 문제에다가 퍼붓는 정력을 좀 더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제국을 세우고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pp.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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