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레이닝 스톤Raining Stones, 켄 로치 감독, 1993년

줄곧 보아왔던 영국 영화는 웬지 우울하고 어두웠다. ‘철의 여자’ 대처가 영국을 완전히 죽 쑤어놔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서민의 딸이었으나 자신의 계급을 등지고, 그들의 것을 너무도 많이 빼앗았다. 특히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많았던 것은 대처가 집권할 때 광부들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복지도, 웃음도 빼앗긴 자들의 신음이 우리가 최근 들어 보았던 많은 영국 영화의 배경이다. 그런 영국 영화 중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두드러지게 당파적이며, 색깔 있고 철저하게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여기 마음이 약해 양 한 마리도 제대로 도살하지 못하는 남자 밥과 토미가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온갖 잡역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절대 용서 안 되는 착하고 무능력한 사람들이겠지만.

사회안전망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실업은 일종의 시민권 박탈과도 같다. 한국사회도 이제 만만치 않은 실업률을 자랑한다. 예전에 일하던 교회기관에서 갑자기 정리해고되었을 때에 집에 차마 잘렸다는 이야기를 못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척하고 저녁에는 시간 맞춰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무려 6개월이나 했다. 잘렸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텔레비전 뉴스에서 청년실업이 심각하다는 보도에 이내 말문이 막혀버린다. 이럴진대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암담하겠는가.

하여튼 실업자 밥은 첫영성체를 앞둔 딸에게 새 드레스를 꼭 사주고 싶어한다. 주위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어디서 받든지 빌리자고 하지만, 아이에게 참으로 소중한 날이기에 또 아이의 기를 죽일 수 없다며 어떻게든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 천사 같은 딸아이의 드레스를 장만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근근히 먹고 사는데 어떻게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드레스를 장만하겠는가. 밥은 별일을 다한다. 장비를 빌려 하수구를 뚫고, 바에서 험한 일을 하다가 두둘겨 맞고, 잔디를 훔치기도 하며, 어렵사리 소중한 딸아이의 드레스를 마련해준다.

탠시라는 고리대금업자가 밥이 없는 사이에 집에 들이닥쳐 심각한 행패를 부리며 아내와 딸까지 위협했다. 딸아이 드레스를 사주기 위해 대출회사에서 돈을 빌렸는데, 빚을 못 갚자 그 빚이 탠시에게 넘어간 것이다. 밥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에 들어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바로 탠시를 찾아간다.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사고로 얼떨결에 탠시가 죽게 되고, 그의 빚 장부를 훔쳐온다.

▲ 신부는 고해성사를 통해 밥의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
겁이 난 밥은 곧바로 본당 사제를 찾아간다. 신부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한다. 단 차마 이 사실을 아내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겠으니 대신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그러자 그 사제는  “그자가 죽어서 많은 선한 사람들이 편히 잘 수 있어.”라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며 밥이 들고온 빚 장부부터 태운다. 그리고 “자네 같은 사람들은 삶의 양식이었던 주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갈구하지. 자넨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며 고해성사를 주면서 죄책감에 시달릴 밥의 영혼까지 위로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해성사였다.

비록 영화지만 간만에 멋진 가톨릭 사제를 보았다. 물론 실정법 위반이겠지만, 저렇게까지 사태를 직시하고 가난하고 착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다니.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한’ 저런 태도가 사제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무사히 첫영성체식을 치루는 가운데, 경찰들이 밥의 집을 찾아간다.

▲ 경찰들이 왜 왔을까?(힌트: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영국경찰)
영화는 전반적으로 우울하기 그지없다. 딸에게서 용돈을 받고 흐느끼는 백수 아빠 토미. 도대체 딸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요즘 살 만하다는 아는 사람이 잠시 뒤에 빚쟁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지 않나. 바깥에서 희망 없이 헤매는 아이들. 일자리가 없어 근근히 살아가는 가여운 사람들의 풍경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엥겔스가 한참 자본주의가 발전하던 19세기 영국 노동자계급의 처참한 상황을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저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했다면, 〈레이닝 스톤〉은 영화를 통해 폭로된 현대판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인 셈이다. 그런데 이 한 편의 영화가 살짝 귀띔해주는 것 같다.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그런 것 같지. 글쎄.”

쌀쌀한 아침 출근할 때 모 대학의 흉물스러운 교문 앞에서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청소노동자들의 집회를 보곤 한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자리와 비정규직과 관련된 자본의 횡포, 이제는 학원과 교회까지 거기에 가세한 지경이다. 갈수록 희망이 없어지는 이런 풍경에 한 지인이 그답지 않게 ‘조국이여, 어여 망하라’고 절규하는 글을 썼으리라.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심정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여전히 제도적으로 미천하고, 사회적 이성의 수준이 밑바닥에서 맴도는 것을 방증하는 많은 풍경들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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