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이제민]

저는 이제 반송성당을 마지막으로 신학교 생활과 본당에서의 사목을 끝내고 명례로 들어갑니다. 반송은 제가 마지막으로 짐을 싸는 본당이고 명례는 제가 더 이상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제가 지금까지 지고 다니던 짐을 다 버리고 가게 될 곳입니다. 명례는 제가 영구히 머물 마지막 집으로 제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열어주는 곳이 될 것입니다.

처음 광주 가톨릭대학교로 불림을 받았을 때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두려운 바가 없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한국 신학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애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문 연구에 저의 온 생을 바치고자 소유한 책들을 다 신학교 도서관에 기증도 하였습니다. 볼 책이 있으면 언제든 도서관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꿈과 기쁨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저는 곧 교구로 불림을 받아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로 발령이 난 것이 바티칸의 경고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서 당시 교구장 주교님께 섭섭한 마음을 표하였고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정양모 신부와 서공석 신부 그리고 저와 관련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섭섭한 마음을 소화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곧 본당 생활에 익숙하게 되었고, 본당에서 신자들과 사는 것은 제게 또 다른 기쁨을 주었습니다.

바티칸의 경고 이후 시작한 본당 사제생활... 여기서 발견한 '복음'

▲ 이제민 신부
신학교 이후 처음 부임한 구암동 성당에서 저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신자들과 처음 성당을 찾는 예비신자들을 상대로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 깨우치기 위하여 고민해야 했습니다. 신학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풀이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리를 전수 받고도 마지막 순간에 배반하거나 도망쳐버렸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신학이 없었고 신앙이 약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어 신앙의 내용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신앙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고백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저 암기하여 외울 때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신앙하지 못하고 신앙하는 마음으로 신학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저는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였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먼저 던지셨을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입시키려고 하셨을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대드셨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분은 이를 어떻게 전달하셨는가 하고 물으며 고민하던 중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서 발견하였다는 것은 제가 이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왜 다른 어떤 말씀이 아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말씀을 당신의 가르침으로 선택하셨는지, 왜 이 말씀이 복음인지, 깨닫도록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예비신자 교리를 예수님의 복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계속 있었다면 저는 아직도 저의 신학을 복음에 근거하여 세우지 못하였을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당의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은 제게 복음이 신학의 기초라는 것을 깨우치며 저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스승들입니다.

그 후 저는 복음을 소화하려고 애를 쓰며 본당에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저의 강론과 강연도 항상 여기서 출발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자에게 가르쳤던 교리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었는데,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일종의 교리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저는 이 책에 “그리스도교 신앙 안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신자들은 이 책이 어렵다 하고 예비신자들은 이 책이 쉽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로 복음화 되는 게 아니라, 
복음화 되기 위해 그리스도교에 입문한다


▲ 명례성지 성당(사진출처/명례성지 카페)
본당에서 생활하면서 저는 많은 어려움과 한계도 겪었습니다. 이는 제가 교회와 신자들에게 어려움과 불편을 주었다는 말도 됩니다. 여기에는 복음화에 대한 이해도 한 몫을 차지합니다. 교회가 줄곧 부르짖는 세상의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비롯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려기보다 교회의 영역을 넓히는 일을 복음화로 이해하며 예비신자가 적게 모집되면 불안해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복음화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화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입문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세상의 복음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의 복음화를 원한다면 우리와 교회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밖을 향해서만 외칩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만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는 본당에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레지오 마리애(이하 레지오)와 일부 여러 신심운동에서 만납니다. 그중 레지오는 한국 교회에 공헌한 점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레지오는 그 평신도 사도직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레지오에서는 공의회에 영향을 끼친 그 정신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의회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천주교 신자로 채워진다고 세상이 복음화되는 것이 아니다

레지오가 주요사업으로 펼치는 회두권면이나 개종권면 등은 타종교와 타교파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공의회의 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레지오가 진정 세상의 복음화를 바란다면 이런 용어들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이 천주교 신자로 채워진다고 세상이 복음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가 천주교 신자로 개종한다고 세상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불러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것인가 하는 것으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이 잘 안 보입니다. 저는 틈만 있으면 레지오의 모임에서 개종권면 대신 종교간 대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답변은 한결 같습니다. 상부의 명령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직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교회의 일에 충실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 교회에 팽배해 있는 사고는 성직자가 곧 교회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공의회가 극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공의회에 의하면 성직자가 교회이듯 평신도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의 변화를 잘 읽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성직자의 책임이 큽니다. 그들이 자신만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한 교회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담당신부라는 이유로 주회에 들어가 훈화하고 강복하도록 강요를 받을 때 저는 부담과 한계를 느꼈습니다.

제가 여기서 레지오를 예를 들어 비판한 것은 레지오의 변하지 않는 현주소가 그대로 한국 교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한국교회가 자기의 미래를 걸고 강조하는 소공동체 모임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조직은 제가 본당에서 사목하는데 가장 한계를 느끼게 하며 부담을 주었습니다. 저는 소공동체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평신도가 자율적으로 복음 읽기를 한다는 것은 적극 장려해야 할입니다.

문제는 반(구역)모임에 소공동체 모임을 접목하면서 생긴 무리수입니다. 반의 모든 구성원들이 모여서 복음 나누기를 하고 묵상을 한다고 하지만 어린아이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반 구성원을 생각할 때 이 구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교회(이때 교회는 성직자)는 이 모임에 참여 하는 것을 신자들의 의무인 양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신자들에게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소공동체가 신자들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한국의 소공동체 조직에서 저는 전형적인 성직자 중심의 교회 모습을 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하느님 백성이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목으로 이해하고자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 조직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조직은 평신도들에게 그들도 (성직자처럼) 교회라는 의식을 심어주기보다 그들을 더욱 성직자에게 의존하게 합니다.

자연히 저는 이 조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신자들 보기에 본당사제로서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며 그런 가운데 교구와 신자들 사이에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본당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소공동체 조직 말고 제 나름의 복음화 운동을 펼치고도 싶었지만 한국 교회의 수많은 신심단체를 생각할 때 그것은 신자들에게 이중의 부담을 줄 뿐이라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여러 개의 성경 공부반을 레지오와 소공동체의 대안으로 적극 장려 하였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수용해야..

그렇다고 본당에서 제가 늘 힘들게 산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할 때 저는 가장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시간은 제게 복음과 성체를 묵상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미사에 온 신자들에게서 큰 위안을 얻었고 그들에게서 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그들이 교회(이 경우 성직자)가 지시하는 것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지오를 예로 들면 대부분의 단원들은 상부가 지시하는 회두권면이나 개종권면의 차원을 넘어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개종시키겠다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레지오 조직이 단원들의 신앙 의식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단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받아들일 때 레지오는 복음화를 위한 조직으로 자신을 쇄신하며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가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수용하는 날 복음화한 교회로, 세상을 복음화하는 교회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에게서 신앙 감각을 느끼면서 저는 올바른 복음화 운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를 진정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성직자는 그들의 마음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권위적으로 관리하려는 차원을 벗어나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자신을 발견하면서 사목하고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복음화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의 권위로 신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성직자가 늘 신자들로부터 변화되어 왔다는 교회의 역사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명례성지 전경(사진출처/명례성지 카페 http://cafe.daum.net/myungrye)

명례성지의 발견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 드리고 그들을 상대로 강론하고 가르치는 일은 제게 큰 기쁨을 주었지만 제 자신이 사목자가 아니라 점점 관리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복음의 삶을 살기보다 신자를 관리하는 것을 사목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우리 교회 현실에서 관리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제가 신자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저를 본당 신부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고맙기도 하였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 말없이 사목에 열중하는 여러 본당 동료 신부님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존경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례성지를 발견하였습니다. 5년 전 2006년 함부르크에서 교포사목을 끝내고 진영 본당에서 짧게 사목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례는 순교자 신석복이 출생한 곳입니다. 처음 명례를 찾았을 때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전경에 감탄하기도 하였지만 언덕 위에 초라하게 방치된 성전을 보고 그리고 순교자 신석복이 명례의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놀랐습니다.

곧 그의 생가 터가 축사로 변해 방치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명례가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이자 이 땅에서는 처음으로 서품되신 강성삼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다가 돌아가신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명례가 대구, 부산, 왜관에 이어 영남에서는 네 번째이자 마산 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명례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신앙 선조들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과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고픈 마음이 일었습니다. 진영에서 반송으로 본당을 옮긴 후 주교님의 재가를 받아 창원지구의 여러 본당신부님들의 협력과 교구를 초월한 여러 본당 신자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기도 덕분으로 순교자의 생가 터를 매입하게 되었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지어진 성전과 함께 이 일대를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도 하였습니다. 특히 반송성당 신자들은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가 아마 다른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면 오늘과 같은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을 뿐더러, 명례는 교회의 무관심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명례 언덕에 '복음화' 학교를..

이런 중에 반송 성당에서 제 임기가 끝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교님을 찾아뵙고 반송 성당 임기가 끝나면 저를 명례로 발령을 내려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주교님도 명례성지와 반송 이후의 제 문제로 고심하던 터라 제 안을 쾌히 받아들여주셨습니다. 제가 명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명례성지를 조성하는데 투신하고 싶은 마음 외에 제 삶을 찾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명례성지 조성은 저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처음부터 저는 이 일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후원회 회원을 모집할 때 한 말이기도 합니다. “벽돌 한 장이 모이면 한 장만큼, 백 장이 모이면 백장만큼 그렇게 한 평 한 평 성전을 가꾸어 가고자 합니다.”

제가 명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앞에서 길게 본당 생활에서 제가 느낀 한계를 이야기하였기에 듣기에 따라 마치 이를 피해 명례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저는 본당에서 사목하는 여러 동료 사제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그동안 생사고락을 나눈 여러 신자들에게도 얼굴을 들지 못할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계를 느끼면서 동료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묵묵히 사목하는 그들을 대하면서 종전 교회 제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각을 세웠던 저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느낀 한계가 동료 사제들과 신자들 그리고 교회가 복음화를 위하여 풀어야 할 과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저는 명례에 ‘복음화 학교’를 세워 저를 복음화하고 저와 제 이웃이 사는 세상을 복음화하고 무엇보다도 교회를 복음화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습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마음을 열어 주교님과 상의하지 못했기에 주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이 학교를 구상하면서 명칭 때문에 여러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복음화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약간의 고민도 하였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너무도 많이 사용하여 케케묵어 보일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이 단어를 고집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결코 케케묵은 단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하느님’이라는 단어처럼 케케묵은 단어가 또 있을까요? 그러나 인생에서 ‘하느님’ 이라는 단어보다 더 중요한 단어는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이 단어를 더욱 사랑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라는 단어도 거창하게 들리지만 명례 언덕이 그대로 복음을 느끼게 하는 학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화 학교 앞에 명례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명례에 그런 학교를 세운다는 뜻도 있겠지만 명례 언덕이 그런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고 여기서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 온 세상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복음화는 복음실천운동입니다. 복음화는 세상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입니다.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어째서 복음인지 깨닫도록 해야 하며 자신을 복음화하는 일이 먼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당신의 복음화한 몸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은 광야와 요르단, 산과 호수,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여기며 드나드셨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 그가 세리든 창녀든, 부자든 가난하든, 지위가 높은 낮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두를 -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집으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하느님의 집으로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명례 복음화 학교는 이런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명례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강이 지금 파괴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복음화는 인류의 평화는 인간의 힘과 돈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운동입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구유와 처참한 십자가에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날 우리 인류는 진정한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명례 복음화 학교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깨우쳐 줄 것입니다. 이 학교는 내년 봄쯤 열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추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학교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학교의 시작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명례복음화학교가 열릴 즈음부터는 명례에서 매일 미사도 봉헌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조용히 그러나 가슴 벅찬 마음으로 본당 생활을 끝내고 명례에 들어갑니다. 명례가 순전히 여러 분들의 후원과 자원 봉사 그리고 방문으로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명례를 많이 사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 1월 초
이제민 드림

이제민/ 신부.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천주교 마산교구 부암동과 반송교회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현재 명례성지로 부임했다. 저서로 <교회-순결한 창녀>, <하느님의 얼굴>,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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