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주최 제8차 심포지엄 기조강연

올해 우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6월 10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여러 행사를 치렀다. 특히 지난 1월 14일에는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숨진 바로 그 순교의 현장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박종철군 추모 20주기와 함께 6월항쟁 20년 기념행사 선포식을 거행했다. 가히 기적과 같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날 박종철군과 함께 고문의 현장에서 고통 받았던 모든 의로운 민주인사들을 기리며 이들의 고통을 부활과 영생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청화스님과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로 기도를 올렸다. 또한 지난 5월 18일에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조작은폐를 폭로 공개했던 바로 명동성당 그 자리에서 6월항쟁 2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사실 6월 민주항쟁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반대단식투쟁과 함께 김승훈 신부님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고문폭로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이루어진 민중혁명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면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은 올해 심포지엄 주제로 민주화 20여 년의 여정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은 또한 어디에 있는가? 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함께 성찰하고 성서 본래의 가르침에 따라 초심을 갖고 초기교회, 박해시대의 교회,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했던 그 순수한 자세를 되새기고자 한다. 따라서 본 기조강연 1부에서는 전사적(前史的) 관점에서 몇 가지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2부 후반부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과 함께 60년대 이후 민주화과정 참여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반성과 성찰이 미래를 위한 창조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쓰라린 체험 - 현실교회, 그 제도적 한계성 

안중근 의사의 쓰라린 체험

안중근(토마스1879-1910) 의사(義士)는 말 그대로 의로운 분이다. 의로움은 바로 구원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실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로마서의 의화론이다. 그렇다면 ‘의사’(義士)라는 표현은 단순한 존경의 의미를 넘어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안중근 의사를 우리는 보통 침략국 일본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얼빈에서 사살한 분 정도로 알고 있을 뿐 그의 신앙적, 사상적 고뇌를 간과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8세때인 1896년 아버지 안태훈 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뒤 7여년 가까이 빌헴(Joseph Wilhelm, 홍석구) 신부의 복사(服事)로 황해도 일대를 다니며 전교에 온힘을 쏟고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교리교사이기도 하다.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 전반부는 바로 신의 존재증명 5방법 등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기초한 19세기 말엽의 기초교리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자서전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8세까지 철저한 유교교육을 받은 그가 세례와 함께 자연스럽게 유교적 교훈과 가톨릭 신앙과 접목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토착화의 한 예범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가장 훌륭한 전통적 한국인이며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 그리고 선구적 투신가이다.

사실 이 7년간의 안중근의 신앙은 하느님과 이웃, 무엇보다도 민족공동체를 위한 투신의 토대와 기초가 된다. 프랑스 선교사를 도와 복음 선포에 전념했던 안중근은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다. 빌헴 신부와 함께 서울명동의 뮤텔 주교를 찾아가 한국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 사범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진지하게 건의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뮤텔 주교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한다. 너무도 큰 실망이었고 좌절이었다. 안중근의 쓰라린 체험이다. 진지한 건의가 하찮게 거절당했을 때의 아픔, 이 아픔이 안중근을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다. 안중근은 새삼 숙고했다. 도대체 선교사란 어떤 존재인가? 한국에 복음을 선포하는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안중근의 이 쓰라린 체험이 바로 그에게는 골고타 체험, 십자가 체험이었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존경하며 배웠던 불어교과서를 집어던지고 스스로 교육자가 되는 일에 투신한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한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프랑스인, 외국인이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을 넘어 하느님과 우리 민족을 위한 새로운 투신의 삶을 선택한다. 신앙은 보편적이지만 그 신앙을 지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국적이라는 외투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옷을 찾고 입어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에 그는 진남포 성당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2대 교장이 되고 야간 삼흥학교를 운영관리 한다. 참으로 미래를 직시한 교육가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언론에 종사하며 교육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결국 무력투쟁을 통해서만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독립군에 투신한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다. 이에 대한 뮤텔 주교의 반응은 냉혹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기간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의 외면과 홀대 속에 참으로 외롭게 그리고 힘들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의 이 모든 인간적 한계를 신앙으로 초연하게 극복하였다. 다행히 빌헴 신부가 사형직전에 그를 찾아가 종부성사를 베풀고 그와 함께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안중근의사의 믿음은 참으로 대단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냉대와 편견 등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초지일관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늘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모님의 전구를 빌며, 어머니와 아내, 두 자식을 기억하고, 그의 큰아들 분도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믿음, 그가 바로 우리 신앙의 표본이다. 그리고 이웃과 겨레를 위한 길잡이며 인간화, 민주화의 표본이다. 참으로 그는 대단한 신앙인, 위대한 신학자, 선구적 사상가, 교육자이다. 

독립운동과 용산신학교 신학생들의 아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의 소리는 서울 용산신학교와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도 전달되었다. 순교선열들의 믿음을 본받고 ‘신앙의 결단으로’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입학했던 우리의 선배들, 나라를 빼앗긴 슬픔 속에서 이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늘 마음속에 되새겼으리라. 사제의 꿈을 안고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았던 이들은 교회적 믿음과 현실에 대한 대처 방안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신앙은 국가를 넘어선다지만 그 신앙이 전달되는 과정에서는 늘 사람을 통하게 마련이고 그 사람들은 꼭 어느 나라 어느 국가에 속하게 마련이기에 그가 속한 국가의 이익과 신앙의 전달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교회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에도 정도가 있다. 같은 외국인들이었지만 개신교권의 미국 선교사들과 가톨릭의 선교사들 사이에는 한국의 독립에 대해 너무나 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네 옛 신학교에서는 조국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곧 죄가 되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쫓겨났다.1) 아픈 마음으로 시편작가의 탄원기도 형식을 빌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기도 올린다.

“하느님,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불렀다고 신학교에서 쫓겨나야 합니까? 그것이 신학교의 규칙을 어긴 것이고 스승 사제들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나라를 빼앗긴 가운데 만세 부른 동료들이 쫓겨나는 현실을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만세도 부르지 못하고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묵묵히 비굴하게 순명이란 이름으로 신학교에 남아있던 그들이 사제품을 받기에 정말 더 합당했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놀랐고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며칠 동안 고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가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으니 웬일입니까?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신학교에서 부제들과 함께 민족통일을 위한 신학적 작업 세미나 때 나는 또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37년부터 한국천주교회는 완전히 친일교회, 일본의 왕에 예속된 교회가 되어 신사참배는 물론 일왕을 위해 매일 아침 저녁기도를 권하고, 매월 첫 주일은 물론 특히 4대 축일 때에는 더욱 장엄하게 의식을 펼치고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완성과 병기 헌납과 1인 매월 1전 헌금 운동을 펼치고 더구나 순교적 자세로 일본에 충성을 다하도록 권했으니 너무도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물론 오죽했으면 그렇게 하였겠는가? 라는 조건과 가정을 전제하고도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목한 친일인명 99인 중에는 한국천주교회의 첫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평신도의 귀감인 장면 박사가 포함 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나는 마치 법정의 죄인이 되어 노대주교와 장박사의 본심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검사와 판사가 죄인의 읍소를 듣고 감동하는 일이 없듯이 그들도 내 말을 듣고는 그저 고개만 끄떡끄떡 했을 뿐이다. 

한국교회의 시대적 역사인식, 그 실천과 한계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는 20세기 가톨릭교회의 전환을 이루는 사건이다. 요한 23세로부터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시대의 징표, 신앙의 일상화(Aggiornamento) 초기교회에로의 회귀, 회개, 쇄신, 사목적 배려, 열린교회, 개방적 구원관 등 1560년대 ‘트렌토 공의회’이후 무려 400년을 지배해왔던 교회의 폐쇄성, 세상에 대한 배타성을 극복한 가히 혁명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신학의 흐름과 시대적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한국교회의 주교사제들은 멈칫멈칫했을 뿐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한 채 시대의 조류 속에 떠밀려 온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조류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갈구하며 외쳤던 ‘깨어있는 소수’가 그 물줄기를 포착했다. 

불사조의 신화 - 4·19 민주혁명

1960년 4·19 혁명 당시 혜화동 대신학교는 수요일 오후에만 외출이 가능했다. 때문에 우리는 4․19혁명의 현장에 있지는 못했다. 다만 동성고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었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들었다. 신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식사 전에 양심성찰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이날 당시 학장이셨던 한공렬 신부(후에 전주, 광주교구장 대주교 역임)께서 즉석 강론을 하셨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면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탄에 스러져간 젊은이들과 학생들에 대해 우리는 역사의 빚을 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불사조’에 대한 예화를 들면서 강론을 이어가셨다. 자신을 불태우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전설의 불사조. 고대 이집트 전설에 따르면 아라비아 사막에 아름다운 불사조가 살고 있는데 오백년을 살고 난후 자기가 태어난 나무둥지에 몸을 비벼 자신을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그 한줌의 재속에서 알이 생겨 불사조는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동방을 향해 날아가 다시 오백년을 산다는 전설 속의 불사조이야기를 하셨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 불사조 전설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상징을 보았다. 학장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운 젊은이들이 바로 불사조라 예찬하셨다. 민주주의의 재가 되어 민주주의라는 생명을 잉태시킨 이 젊은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라는 해석이었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강론이었다.

당시 신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이것을 삶의 길잡이로 삼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준비 중인 이때 4·19의 교훈이 신학생들에게 민족과 역사와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구원과 해방의 삶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의 이야기는 들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반성하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올바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은 반드시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도 말씀과 행위를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삶 역시 들은 바를 실천하는 데 있다. 이렇듯 4·19 민주혁명의 씨앗이 침묵과 통제의 신학교에 뿌려졌고, 이는 70년대와 80년대를 넘어 뜻을 같이하는 동료 사제들의 사회투신 정신의 터가 되었다. 이를 두고 서중석 교수는 2004년 9월 사제단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70년대 전국적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운동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러한 4·19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석했다. 

로마에서의 새로운 깨달음

65년 로마 유학시절의 이야기이다. 나의 눈에 비친 이탈리아인들의 종교적 현실은 유교적 전통과 가톨릭교리 사이에서 혼돈스럽고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과는 달리 역사·신앙·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일치를 이루는 로마의 모습은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 왜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의 미사와 전례 안에서 들어와 융화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체험이 신앙의 체험이라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유교적 전통에 충실하면서 가톨릭을 선택했고 민족주의자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던 안중근 의사를 왜 우리는 미사 때에 기억하지 않는가? 삼일독립만세 운동의 꽃 유관순 열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발굴되고 기억되는 의로운 삶과 이야기들이 한국가톨릭 문화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래야 민족의 체험과 기억의 바닥을 지닌 한국인의 신앙과 신학이 형성될 수 있다.

프랑스의 드골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5년간의 치욕스런 독일의 지배를 기억했다. 이날 그는 독일정권에 야합하고 부역했던 주교들이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억압받은’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주교들은 이제 ‘해방된’ 백성들과 함께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드골은 계속 교황청과의 비밀외교를 통해 그 반민족적 주교들을 해임시켰다. 여기서 프랑스의 정신, 드골의 철저함이 확인된다. 한국의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은, 아직 반민족, 반민주적 행위를 했던 주교·사제들에 대한 기억이 ‘반성과 청산’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숙하지 못한 백성, 성숙하지 못한 교회는 체험과 기억을 재구성할 능력이 없기에 굴욕의 역사를 반복한다. 2007년 선거를 앞둔 지금도 모순과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로마로 유학 간 1965년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마무리되는 해였다. 나는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흥분도 없지 않았다. 공의회의 폐막을 알리는 전날인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1054년의 파문선언과 1453년 오스만터키의 지배와 함께 자율권을 상실한 콘스탄티노플의 상처를 되새기며 상호파문을 철회하고 말씀의 전례를 통해 화합과 용서, 사랑을 다짐했다. 당시 성사신학교수는 교황과 총대주교의 화해예식이 미사가 아니란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 사이에는 성사적 상통과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만일 그날 교황과 총대주교가 미사를 봉헌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가정적 질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현실화되었다면 우리 같은 신학자들은 갖가지 이론으로 그 사실을 정당화시키는 해석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교회의 분열과 일치라는 역사적 사건은 소박한 신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이다. 어떻게 교황과 총대주교가 파문하면 교회가 갈라지고 또 어느 날 갑자기 교황과 총대주교가 파문을 철회하면 일치와 화합이 이루어지는가? 하느님 앞에서는 가소로울 뿐이다. 신학적 모순이다. 일상의 신앙인들은 이들 교회책임자들의 선언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신자들은 전에도 지금도 신앙 안에서 전혀 갈라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책임자의 결정에 따라 갈라지고 또 일치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신학적 깨달음으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제도교회를 넘어설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제도교회를 넘어설 수 있는 은총과 용기, 바로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우리 시대에도 또한 이천년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요구된다. 예수의 말씀과 삶은 기득권과 종교적 제도성에 사로잡힌 수구세력에 대한 저항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는 십자가라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선다는 것이 어떠한지를 예수님은 분명히 전해주셨다. 그것은 기존 가치관의 전복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가 예수와 관계되고 있다는 것은, 사물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부활이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까이 와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새롭게 눈을 뜨고 하느님 나라를 보려 했다.

강화도 심도직물사건과 전 미카엘 신부(Fr. Michael Bransfield)

1966년 8월 14일 강화본당 JOC 회원 12명이 투사 선서식을 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67년 5월 14일 노조를 결성했다. 1968년 1월 4일 노조 분회장을 회사는 2일간 무단결근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이에 노조원들은 모임을 갖고자 했으나 회사 내에서는 집회가 불가능하여 경찰에 구두신고하고 성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경찰 20여명은 성당내의 강당에 불법으로 들어와 이 모임을 강제해산하고 조합원 5명을 연행하였다. 그리고 1주일 내내 30여명의 노동자들을 연행하면서, 메리놀회 소속 전미카엘 신부의 사상 등에 대해 조사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펼쳐졌다.

심도직물 회장은 당시 공화당국회위원 김재소, 사장은 김재기였다. 이 사건 이후 강화 경찰서장 정보계장 등이 1968년 1월 7일 오전 10시경 성당에 와서 전 미카엘 신부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회장 김재소 국회의원은 다음날 1월 8일 오전에 종업원 350여명을 강당에 모아 놓고 노조 때문에 회사를 패쇄 하겠다며 150여명을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결성하고 반대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강화도 천주교신자 고용거부 사건 수습대책위>를 결성하고 주교단은 2월 1일 항의성명을 발표하여 7개항의 견해를 발표했다. 그리고 노동위원회의 중재로 해고된 이들이 복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 미카엘 신부는 일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70년대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

1965년 원주교구의 설정과 함께 교구장이 된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코자 독일교회의 도움을 받아 가난을 극복하고 교구간의 장벽을 없애고자 노력하였고, 특히 부유한 서울 교구를 무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권력형 비리타파를 외치며 1971년 원주 MBC 방송사의 재정공개와 투명한 운영을 요구하며 원주교구가 투자한 몫의 정당한 권리를 주창했으나, 사장이 박정희와 친인척이라는 배경으로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원동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사제단과 함께 불의타파 시위를 펼치게 된다.

이후 1974년 7월 6일 로마에서 귀국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곧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구속된다.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학생들의 시위자금 명목으로 백여만원을 건네주었다는 혐의였다. 지 주교의 구속으로 모든 민주인사, 청년학생들의 석방요구와 함께 불의한 유신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교회안팎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4년 7월 10일 명동철야미사를 봉헌한 후 수도자·신자·사제들이 결속되어 평균 매주 1회 서울·인천·원주·안동·춘천·대전·광주·전주·부산·마산·대구·청주·제주 등 전국 14개교구 전역에서 인권회복과 지학순 주교 등 민주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미사봉헌을 계속했다. 그리고 1974년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 축일에 명동성당에서 미사봉헌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이날 미사 후에 수도자, 신자 등과 함께 사제들이 앞장서서 유신타파와 민주회복을 주창하며 최초로 명동거리에 나와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고민하며 세상의 현장에 뛰어든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후 정의구현사제단은 오늘까지 그날의 체험을 세상의 현장에서 재현하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체험은 참으로 귀중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의 정신에 따라 세상 한복판에서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한 삶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기도와 성스러운 자세, 열정적 신자들의 도움과 격려 등에 힘입어 사제단은 시대적 소명을 되새기며 예언자적 임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또한 개신교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몸 바친 청년학생·시민·노동자·농민·도시빈민·변호사·교수·언론인·문인·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더불어 손잡고 민주화의 여정에 함께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보편적 이상을 꿈꾸는 행렬이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이와 같이 우리는 교회건물이란 공간을 넘어 인간성에 기초한 종교와 문화, 구원의 완성에 다다를 다양한 방법과 여러 가능성을 삶의 현장에서 확인하며 이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섭리임도 새삼 깨달았다.

역사변혁의 주체와 원동력은 바로 뜻있는 숱한 익명인들의 헌신과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의식을 지닌 익명인들의 관심과 헌신이 우세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기 마련이다. 반면 맘몬사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민중은 의식을 잃게 마련이다. 온통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측정하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렇다. 투신의 철저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의 현실이다. 여기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진지하게 되새기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여기서 하느님은 포괄적 그리고 우주적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느님은 바른 가르침, 인간적 삶, 자유와 평화, 공유, 민주적 일체의 가치 등의 총화이기도하다. 이렇게 하느님을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던, 강화심도직물사건·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 과정에서, 수도자들과 익명의 교우들은 한국교회 민주화 여정의 귀중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 민주화의 길잡이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은 우선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대의 징표를 읽어낼 수 있는 힘은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에 있다. 아죠르나멘또를 일본인들은 ‘현대화’로 번역했고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일본식의 번역을 따랐다. 그러나 ‘아죠르나멘또’는 매일매일 다가가는 행위, 필요에 따라 회합의 장소를 옮긴다는 뜻과 함께 ‘신앙을 매일매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한다. 따라서 ‘신앙의 일상화’로 해석해야 핵심에 가까운 번역이 될 것이다. 또 세 번째로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제어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믿음과 증거의 삶을 공유하고, 또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신앙의 근거를 지키고 전했던 그 원체험의 시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초대교회 삶은 그 자체가 그들의 문화이자 그들의 신앙이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토착화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추석과 설날을 한국천주교의 전례로 들여왔듯이 다른 우리 모든 문화를 신앙 안에서 껴안아야한다. 그리하여 3·1절, 4·19민주혁명, 5·18 민중항쟁, 6·10민주항쟁, 6·15남북공동선언일, 8·15해방절 등을 축일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공의회 문헌 중에 ‘사목헌장’은 핵심을 이루는 문건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중의 하나는 ‘사목적 배려’이다. 사목적 배려는 열린 가능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배려한다. 그리하여 사목헌장은 교회의 자기반성과 성찰, 연대라는 주제어를 통해 사회의 제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동선’이라는 주제 역시 이러한 울타리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검토와 이해를 동반하지 않았고, 또 공의회가 요구했던 내적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채, 공의회의 내용을 별 고민 없이 읊조렸을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아죠르나멘또”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에 대해 일차적으로, 주교들의 각성이 요구된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구원사의 과정은 한낱 과거사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를 건물 안으로 그리고 교회의 좁은 공간 안에 가두어놓고는 자족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공동체는 모름지기 폐쇄성, 소극성, 안일함을 깨고 세상과 역사의 현장,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새 맛을 끊임없이 주는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소금장사’로 변질되었다는 지적에 우리 모두는 귀기울여야한다. 민주화의 현장, 역사의 현장이 바로 교회의 현주소였던 것처럼 말이다. 

마무리 - 기억의 재편, 그리고 희망의 현실화

신앙공동체의 결속과 일치를 위해서는 원체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역사와 민주화운동 원체험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 체험에 대한 기억이 현실 안에서 재편되어야 미래의 희망이 다시 현실이 된다. 우리 신앙의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로마 제국주의 아래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았는가? 그들의 체험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서 공유되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현재를 넘어서는 희망의 이야기가 된다.

한국교회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통에 찬 체험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조국마저 멸망하도록 저주했던 그의 고뇌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민주화 20년을 경과하면서 한국교회는 하느님과 만나는 암흑의 때, 어둔 밤을 체험하였는지, 그리하여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끈을 놓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을 넘어서고, 교회를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자생력이 필요할 때이다. 한국교회는 민주화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했다. 그것은 어둔 밤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주님의 체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님이 우리의 빛이 되었다. 주님은 또한 매일 우리 각자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교회를 넘어서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라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민주화는 바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한다는 내적 요구의 실현으로 자유와 평등의 삶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원리이기도하다. 그 어떠한 차별도 없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하나인 평등성의 실현(갈라 3,28), 이것이 바로 민주화의 원리이다. 민주화는 또한 교회공동체의 핵심인 봉사를 전제로 한다. 12사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

그리고 민주화 여정은 바로 사랑과 헌신, 희생의 삶을 다짐함이다. 착한 사마리아사람(루카 10,25-37),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사랑의 명령,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마태 25, 31이하) 이 사실이 바로 참된 믿음이며 구원의 관건이다.

30여년의 반독재 민주화의 여정에서 한국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은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이웃을 위한, 민족과 함께하는 민주화와 자유 실현 그리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길을 성실하게 걸어오기도 했지만 때로는 제도교회의 책임자들이 이 여정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했던 당대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일제강점 하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을 꺼려하며 거짓된 잣대로 순수한 신앙인들에게 제재를 가했던 그 큰 우를 똑같이 민주화 과정에서도 우리네 주교들과 교회책임자들이 여전히 반복했고 지금도 반복하고 있음을 겸허하게 깊이 반성해야 할 때이다. 지금이 바로 그 회개의 때이다.

미사봉헌 때마다 우리는 참회의 기도를 올린다. 그 참회가 형식이 아닌 하느님 안에 온전히 새로 태어나는 작업이기 위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가슴을 치며 일제 강점 하에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기지 못했던 점, 그리고 독재정권하에서 인권회복과 민주화의 여정에 함께 하지 못했던 점, 조국분단 상황에서 일치와 화해를 위해 신앙인답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 이 모든 민족사적 결함과 죄를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역사와 공동체 앞에서 진지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참된 미사봉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웃사랑과 봉사, 민주화를 통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다.
/함세웅 200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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