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성금요일에 수난복음을 노래로 했다. 그 긴 복음의 내용을 전부 노래로 했다는 말이다.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노래로 듣는 수난복음, 신자석에서 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신자생활 50년에 수난복음이 처음 듣는 것처럼 들렸다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신자들이 더러 많았다.

 복음 봉독에 30분이나 걸렸으니 성금요일 전례가 얼마나 길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감동이었다며 감사해 했다.

 전례가 아무 뜻없이 길 때 신자들은 불평한다. 전례 안에서 감동한다면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이 없다.

 부활성야 미사의 성세갱신식 때의 촛불을 켜서 계응하는 부분에서도 모든 신자들이 촛불을 오른 손에 높이 쳐들고 외칠 때 성세갱신은 스스로 감동을 연출한다. 성목요일의 세족례는 모든 신자들이 서로 씻겨주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세례식 때에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세례수가 흘러내릴 때, 세례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세례 때의 그 감격을 되새긴다.

 연중시기를 비롯한 평시에도 매월 첫째 주에는 미사 중의 참회예절을 대신하여 성수축성을 한다. 매월 4째 주는 노래 없는 미사를 하는데, 성무일도를 겸해, 입당성가부터 퇴장성가까지 일체의 노래가 없이 함으로 침묵과 함께 하는 미사를 체험할 수 있다.

 사순시기의 7주간 동안 매 주 미사에서 사순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장면의 연출이 필요하다.

 사순시기에는 미사곡 부터가 달라진다. 사순시기의 주제가가 선정되어 그 해 사순시기에는 40일 동안 계속 불려진다.

 대림시기에게도 이와 같은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성탄성야에는 빛의 예식을 연극으로 시작한다. 주님 공현 축일에는 입당부터가 동방의 박사들을 앞세워 공현의 의미를 심어준다.

 주님 승천 대축일, 성체와 성혈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성모승천 대축일 등등 대축일들은 제각각 그 의미들을 살려주는 행렬과 행사가 필요하다.

 순교자 성월은 우리 한국 교회의 역사를 알려주는 특별 행사들뿐만 아니라, 특히 이 시대의 시대적 징표를 읽게 하는 전시와 전례 중의 강조점이 필요하다. 위령성월은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데에 더욱 중요하다.

 그렇게 전례는 전례시기에 따라 그 의미와 되새김을 위하여 끊임없이 표현하고, 강조하고, 되새겨주어야 한다. 창조적인 전례! 그것은 다름아닌 전례서 안에 다 수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난복음 전곡을 노래할 때, 그 악보를 어디서 구했을까? 전례독서 책의 뒷부분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그 외의 다른 악보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으나 관심부족으로 사장되고 있을 뿐이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자 한다면, 대중의 아픔을 이해하려 한다면 전례 중에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 전례를 통해서 교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강론 중에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 살벌했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시위현장에 있을지라도 강론 중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전례에서는 보편적인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직설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별도로 배부하는 유인물이나 행사를 통해서 잘 알아듣는다. 그것이 전례의 의미이고, 중요성이며, 지켜야 할 이유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성당들을 순례하다보면 참 다양한 표현들과 만나게 된다.

 열정을 품고 살았던 프란치스코였기에 그는 성당의 구조와 장식물 하나에서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어했고, 우리의 의지를 드러내고 싶어했음을 느낄 수 있다. 밑에 깔고 있어야 할 기본, 그것이 전례이다.

 그러한 전례가 재미없어진다면 그건 정말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너무 재미없다.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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