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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으니 사색도 깊어지기를”-성탄 강론을 준비하는 벗에게

“평화가 내 원이건만, 그 말만 하여도, 그들은 싸우고자 달려들도다.” (시편 120,7)

벗이여, 예수성탄이 임박한 시간이니 몸도 마음도 무척 바쁠 줄 아네. 그래도 분주한 일손 멈추고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세나. 요 며칠처럼 성무일도의 시편이 마음에 와 닿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이미 50년 전 토마스 머튼이 “평화는 의심스런 단어였다. 평화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빨갱이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했다.”(토마스 머튼의 평화론 서문)고 했는데 오늘의 한반도의 상황이 어째서 그 옛날 미국과 똑같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 여러 사람들 앞에서 ‘평화’에 대해 말을 꺼낼 때마다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새 국방장관은 천주교 신자라면서 북쪽의 거듭된 위협과 경고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호소마저 무시하면서 사격훈련을 감행하더라. 그걸 보면서 머튼의 불안이 실감나게 느껴졌어. 그런데 이 불장난이 정말 전쟁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지하벙커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저 무서운 참상과 비극을 책임질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선택하지도 않은 일을 책임져야 하는가? 지도자들은 어째서 우리 뜻도 묻지 않고 제 멋대로 결정하는가? 그러나 그런 포괄적 권한을 일거에 그들에게 넘겨버린 것은 우리였다. 번복할 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양간이라도 고치는 심정으로라도 그렇다면 아직 남아 있는 시민의 권능이 무엇인지 살펴보다가 그 어떤 쌍욕을 듣거나 손가락질을 받게 되더라도 평화를 외쳐야겠다는 각오가 단단해지더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 어떤 외교적 언사나 수식 따위를 붙이거나 혹은 에둘러 말하지도 말고, 날 것 그대로 평화라는 교회의 오랜 신념을 천명할 때가 온 것이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생존권이며 둘째, 그래서 군비경쟁과 같은 생명 위협에 반대해야 하며 셋째, 전쟁은 더 이상 ‘침해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며 다섯째, 이런 맥락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하고 여섯째,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말아야 하며 일곱째, 생명을 보호하고 도덕성을 옹호하기 위해 개인의 책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등 일찍이 요한 23세 교황께서 <지상의 평화>에서 말씀하신 평화의 핵심 원칙들을 상기시켜주어야 해.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갖은 불법과 오류들을 감추고 집권 후반기의 이른바 ‘속도전’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전쟁과 공포를 이른바 ‘벼랑 끝 전술’로 써 먹을 거야. 지금으로 봐선 ‘전쟁불사’를 마치 저들이 말하는 ‘국격’의 필요조건처럼 여기는 모양인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전쟁 스트레스로 온 세상을 꽝꽝 얼어붙게 만드는 이 해괴한 장난에서 사람들을 흔들어 깨울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교훈을 남겼어. “세속 권력이 하느님의 의지에 반하는 입법을 하거나 그런 행위를 한다면, 어떤 법률이나 공식 승인도 시민의 양심에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더 많은 경배를 받으실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사목헌장 11항)

이회창 울라프나 ‘조중동’ 계열의 성직자 혹은 여타 신자들이 들으면 몹시 속상하겠지만 이것이 요한 23세 교황의 평화사상을 계승한 공의회의 엄연한 가르침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한반도의 오늘과 같은 상황을 내다보기라도 했는지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금쪽같은 지혜도 예비해 두었으니 전쟁을 단죄하는 교회의 확고부동한 입장(사목헌장 80항)도 전해주고, 비폭력 평화(햇볕!)노선이야말로 복음의 최종 귀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쐐기를 박듯 말해주자.

“권리 주장에서 폭력행위를 거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약자에게 주어지는 방위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사목헌장 78항)

만사에 ‘빨간 펜’ 하나로 대처하는 자들이 들으면 이게 무슨 막말인가 싶겠지만 ‘자연법의 보편적 원리’를 거스르는 세속권력의 명령은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사목헌장 79항)는 대목에 이르면 아마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구절들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거니와 설령 공의회 헌장의 한 대목이라고 해도 오늘과 같은 시점에선 무수한 사람들이 사납게 덤벼들고 말거야. 그래도 우리는 이런 말씀에 어떤 변주를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고 믿어. 그래야 “광야에서 울리는 소리”가 되지 않겠나.

내일 성탄미사에선 여느 때보다 평화라는 말이 많이 나올 텐데 과연 얼마나 복음의 평화와 공명하는 평화일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머튼의 평화론, 180)하고 마는 우리들의 관성 때문이야. 그러니 비폭력적이며 합리적인 조치야말로 무기보다 더 강력하다는 복음의 핵심적 원리와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한 힘도 정신의 무기였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하는데 아, 그대의 직무란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둠이 깊으니 우리의 사색도 한층 더 깊어져야한다. 교우들과 더불어 부디 그대도 평화로우시기를!

“나는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과 너무나 오래 지냈구나. 내가 평화를 바라고 이야기하면 저들은 전쟁만을 꾀하였다네. (시 120,6-7)

* 필자 주 | 지난 12월 20일 연평도 사격훈련 소식을 듣고 깊은 산속 어느 수도자가 제게 보내온 편지 일부를 나눕니다.

김인국 / 신부, 청주교구 금천성당 주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총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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