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장동훈]

좋은 사람들과 실컷 걷다가 돌아왔다. 그 유명하다는 제주 오름과 올레를 돌아보며 전에 관광지를 훑고 다닐 때는 볼 수 없었던 제주의 속살과 내 지나온 나날들의 속살들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시절의 어수선한 그림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섬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올레길 한 코스를 종주하고 다시 시작점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운전사 왈, 도대체 왜 올레만 걷는지 알 수 없단다. 내륙의 관광지들이 올레가 생겨나고 나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말과 함께 연평도의 포격으로 가뜩이나 힘든 살림이 더욱 팍팍해졌다 한탄한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섬에도 바람을 따라 폭약냄새가 날아왔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에 차마 민망한 ‘어버이연합’의 노인들 입에서나 듣던 망언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차라리 전쟁이 나야한다, 우리가 퍼다 준 것이 얼만데 배은망덕하게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냥 하냐고 격분했다. 뒷자리에 앉아 운전자의 험악한 말을 그냥 듣기만 한 내 처사는 무엇일까? 비겁함일까? 아니면 소통불능의 체념일까? 올레길을 걸은 후의 피로감이 운전자의 이야기에 더욱 짙어졌다. 맞장구도 말대꾸도 다 귀찮고 소용없어 보였다.

나의 보잘 것 없는 글과 강론을 귀하게 읽고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애독자’ 중 하나가 나에게 일러준 말이 생각났다. 요즘 나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알던 내가 맞는지 갸웃거린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전에 나의 글에서는 ‘경계’가 없어보였다 한다. 쉬운 말로 이전의 글에서는 한 사건을 바라볼 때 명분과 당위보다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애정이 폴폴 새어나왔는데 지금은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거는’ 보편적 언어보다 소위 이쪽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생각을 은연중에 강요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피로감마저 느껴진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벌써 우물에 빠져 사는구나. 보편적 인간에 대한 끝 간 데 없는 신뢰와 사랑이 노동사목의 시작이고 마지막이건만 어느새 인간을 무리 지워 세워두고 경계를 긋고 제멋대로 이데올로기 분칠질을 일삼는 권력자들의 몹쓸 버릇을 배웠다는 생각에 낭패감마저 들었다.

요즘의 피로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4대강 사업의 지리멸렬함부터 연평도 포격으로 모든 입과 귀가 틀어 막힌 팽팽한 답답함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니 이쯤 되면 인간에 대한 신뢰는 만무하다 싶다. 입으로 새어나오는 말은 연일 불신과 체념, 피로감뿐이다.

결국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저자 엘버트 허시먼이 직시하는 보수의 논리를 몸소 체화(體化)해 사는 꼴이 지금 나의 현실인 듯하다. 사실, 날수조차 헤아리기 힘든 6년간의 지루했던 기륭전자의 복직투쟁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락모락 마음속으로 올라오던 몹쓸 생각은 정말 복직이 되기는 할까라는 의구심이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관둬라, 소용없다”를 반복하는 보수의 논리를 고스란히 심적으로 익혀온 것이다. “관둬라, 소용없다”를 신음처럼 뱉어내며 그렇게 스스로 희망을 잃어버린 조난자로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1300일의 날수만큼 짙어진 피로감에 힘겨운 고비를 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인천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복직을 위한 목숨을 건 몸부림. 그 몸부림이 보수들의 논리를 은근슬쩍 배워 익혀온 한 조난자를 구해주길 희망해본다. 결국 ‘소용없는 짓’을 하다가 ‘어리석게’ 돌아가신 분이 세상과 홀로 싸웠던 스승 예수의 삶이 아닌가? “관둬라, 소용없다”를 이야기하기에는 스승 보기에 너무 민망하다.

그때 택시 운전사에게 이야기할 걸 그랬다. “아저씨, 저와 소주한잔 하실래요?”

장동훈/ 신부, 빈첸시오, 인천교구 노동사목 전담사제

* 이글은 <노동사목> 12월호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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