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안식년을 보낸 지도 벌써 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안식년 동안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이유는 내가 사제로 살지 않은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제가 되기 이전으로 돌아가 사제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자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았던 시절이 바로 안식년 기간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안식년 동안 나는 미사를 신자석에서 참례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또한 같은 성당에서 두 번 참례하지 않는 원칙도 세웠다. 그 원칙 덕분에 참으로 많은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할 수 있었다.

 주일미사만 하더라도 52곳을 넘는데다가 평일미사를 합친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성당을 거의 다니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평일미사는 주로 가까운 성당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70-80개 정도의 본당들을 순회한 셈이다.

 시골 성당을 특히 선호한 셈인데, 시골 성당들에는 대체로 젊은 신부님들이 많다.

 젊은 신부님은 나를 눈여겨 보신다. 이상하게 보이나보다. 성가책도 없이 성가를 다 따라부르고, 기도문도 줄줄 외우고, 신자치고는 거만하게 보이고, 신부에게 겁내지 않고.... 신자가 못되는 이유가 이런 탓일까?

 수녀님들도 의아해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의를 갖춘 인사도 하지 않으면서 수녀님을 보기를 신자들과 똑같이 하니 기분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뭔가가 이상한지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신자가 못되는 이유가 이런 탓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유는 기실 다른 데에 있다. 전례 이야기를 할까 싶다. 그 많은 성당들을 다니면서 내가 놀라워 한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거행되는 전례>였다. 신부님들은 전례를 아무 생각없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설마 그러기야 할까 싶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본다면, 시작예식도 제단에서 한다. 말씀전례의 복음봉독도 제단에서 한다. 성찬전례도 제단에서 한다. 즉, 각 예식의 구분은 아랑곳없이 무너지고 모든 걸 제단에서 해치운다(?). 엄연히 사제석이 있고, 독경대가 있으며 그리고 제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신부는 오로지 제단에서만 전례의 모든 부분을 거행한다.

 그렇게 될 때 제단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몸이 아니라 신부의 책상이 되고 만다. 만능책상! 그뿐일까? 신부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만다.

 시골 성당의 젊은 신부님이 하도 맑게 보이길래 잠시 생각을 뺐겼더랬는데, 글쎄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아, 그렇구나! 신부가 미우면 그 위에,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겠구나. 제단에 높이 달리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앞에 서 있는 미운 신부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나눔으로 다가오시는 제대의 성찬례가 그 앞에 서 있는 미운 신부 때문에 그저 상징으로만 보일 수 있겠구나. 아, 그렇구나!

 전례 이야기를 좀더 하고자 한다. 전례를 통해서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음 차례에 이어서 5차례 정도면 가능할까?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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