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최우혁]

소리 없이 흐르는 물줄기에 언제 우리가 관심이나 있었던가?
샘물은 흘러서 개울이 되고, 한참을 흐르다가 개천이 되고, 또다시 흐르다가 샛강으로 넓어지고, 그 샛강들이 굽이굽이 모여서 강이 되고, 그 넓어진 강은 느릿느릿 바다에 이르러 저 멀리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언제가 다시 비가 되어 돌아 오기도 하고, 옛 전설 속에 묻히기도 하고….

▲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사진/한상봉 기자)

시인 강은교는 이미 70년대에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그저 물은 흐르고, 흐르는 그 물에 던져 넣는 것들은 무엇이 되었거나 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온갖 상처들을 금방 감추고 제 살갗을 가다듬어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가면 그 뿐! 그렇게 늘 제 상처를 감추고 흐르는 물은 마치 늘 곁에 있는 어머니 같기도 하고, 아내 같기도 한 소리 없는 존재였고, 존재하는 고마움도 느낄 필요가 없는 무상의 존재였다.

더운 날 멱을 감다 물장구를 치는 개구장이들, 한겨울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빨래를 하는 여인네들, 한평생 강을 일터로 살아온 강태공들 … 어디 그 뿐일까. 어린 시절 시냇물과 강에 엮인 추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 강을 마음에 애틋하게 새긴 이들은 또한 얼마나 되랴. 그래서 시인 강은교의 오래된 시 한 수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를 읽으며 여유 있는 강물처럼 흐르는 나를 다시 느껴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용감한 물방울이 되어 나를 흐름에 던져 넣고,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 혼자 깊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주위의 모난 것들을 어루만져 위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흐르다가 그토록 그리던 바다에 닿을 수 있다면, 그제야 긴 숨 내쉬며 길게 흘러온 고단한 몸을 처녀인 바다에 맡기고 그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바다에 이를 수 있다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그 모든 강들은 그렇게 희망하며 흐를 것이다. 흘러서 마침내 “내가 소멸되는 그 순간”을 향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기쁘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시인 이해인이 그의 시 “강”에서 노래했듯이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 기꺼이 마지막을 향하여 기쁘게 흐르고 있을게다. 마치 마지막에 이를 수 없다면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없음을 역설하듯이!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물이 끓어오르듯이 “강”을 사이에 놓고 벌어진 싸움판에서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난 5월 31일, 4대강 사업 중지 및 서민을 위한 정치를 촉구하며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의 불 같은 외침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살아있는 모든 미물들, 살아 숨쉬는 물과 흙이 있다고 외치며, 상처난 세상에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먹는다'는 생태계의 법칙을 굳이 들이대지 않아도, 나와 자연이 하나이고, 기후 변화와 예고되지 않은 자연재해가 우리 인간들의 이기적인 개발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임을 이제는 누구나 알아차릴 만큼 심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비구는 마치 강을 파헤치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속죄하듯이, 죽어가는 물과 물고기를 감싸 안듯이 죽음의 대열에 자신을 던져 항거했다.

▲ 사진/한상봉 기자

며칠 사이 숨 가쁘게 보도되고 있는 한국 가톨릭에 관한 언론의 보도가 추기경과 사제들이 교권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것으로, 혹은 마치 물줄기를 바꾸려는 싸움을 하는 모양새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는 누구나 간직한 마음일 것이다. 나아가 사건의 배경에는 국회의 날치기 예산안 통과로 사대강 개발을 위한 예산이 통과된 것과 명동성당 주변의 개발이 허가된 것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비판과 그 비판이 이유 없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침묵해야 하는 양들은 언제까지나 음매~ 소리 내지 말고 숨죽이고 있어야 할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핏줄을 세운 한국 가톨릭의 평신도들은 마치 교권이 대립하는 모양인 작금의 상황에서 어떤 예언적 사명을 스스로에게 요청하며 초대교회의 맥을 이어갈 것인가? 어떻게 강물이 흐르듯이 정의가 흐르고, 핏줄이 흐르듯이 강줄기가 흐르게 할 것인가? 우리의 교회사가 보편적인 신앙의 바다에 이르러 정당한 합류점을 찾도록 어떻게 신앙과 이성을 다해 일상을 봉헌할 것인가? 하여 넓고 깨끗한 하늘아래 정의가 흐르게 할것인가?

우리 “양”들은 오래 전의 목자 아모스의 노래를 향해 귀를 세워본다:

10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11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 내었다.
13 그러므로 신중한 이는 이러한 때에 입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1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광장마다 곡소리가 터져 나오고 거리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리라. 사람들은 농부들을 불러 통곡하게 하고 곡 꾼들을 불러 곡하게 하리라.
17 포도밭마다 곡소리가 터져 나오리니 내가 너희 가운데를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
21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23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10-24)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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