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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교회의 소통을 위한 사목지, <기쁨과 희망>오민환 / <기쁨과 희망> 주간
  • 박오늘 ( othil@naver.com )
  • 승인 2008.11.21 17:50 | 최종수정 2008.11.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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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주교회의 사목연구소에서 펴내던 「사목」이 폐간되면서 교회 안에 충격을 주었다. 1967년 창간된 사목은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한국 교회의 정체성 확립과 신학의 동향 그리고 사목자들의 일차적인 고민인 사목 방향 등에 대한 담론을 풀어내는 장으로서 기능하였다.

이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는 폐간된 「사목」을 발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 교회의 진보적 담론을 끌어내는 장(場)으로서 그 기능을 선포하며 6월 초에 창간호를 펴내어 교회 안팎의 관심과 격려를 받고 있다.

지금여기에서는 6월 24일 기쁨과희망연구원 사무실에서 「기쁨과 희망」의 오민환 주간을 만나서 그동안의 준비과정과 교회 안팎의 현안들을 어떻게 담론화하고 대중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박오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피사체와 소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소통을 하려면 얼마나 오래될지 모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여기」도 사회와 교회의 복음적 소통을 위한 매체입니다. 「기쁨과 희망」은 한국 교회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소통의 장을 열어 가려는 의지를 표명하였습니다. 사회 현실적으로는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를 보고 있습니다. 소통은 이 시대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과연 어떤 소통을 할 수 있는지요?

진보적 신학대중지로

   
 
오민환: 「기쁨과 희망」을 발간하게 된 배경이 지금 던지신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잡지 발간은 사실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학술지 형식으로 준비를 했는데 진행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년 초에 「사목」이 폐간되면서, 기쁨과희망연구원(이하 연구원으로 표기)에 계신 신부님 몇 분이 사목 기획위원으로 활동하셨는데, 그분들을 중심으로 몇 분을 더 연결해서 「기쁨과 희망」기획위원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폐간된 사목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고, 교회 내에 진보적인 소통을 이야기하는 곳이 없지 않은가, 그런 장을 우리가 한 번 마련해 보자 하는 의미에서 좀 더 논의가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잡지 성격이 학술지에서 진보적 신학대중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그런 논의 속에서 첫 번째 작업으로 사제단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 전반을 아울러 30년이라는 ‘민주화 여정 속에서 한국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연구원 제8차 심포지엄 주제로 잡고 이를 「기쁨과 희망」창간준비호 특집기사로 실었습니다. 이렇게 창간준비호를 지난 1월에 내놓으면서 잡지에 대한 반응과 반향을 봤는데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아서 힘을 받았죠. 그때가 대선이 끝났을 때라 창간호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증적인 고민과 대안이 필요한 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에 대해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나 태도를 특집으로 잡아서 창간호를 준비했어요.

결국 「기쁨과 희망」이 다른 잡지들과 차별성을 갖는다면 ‘소통’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 내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소통의 장이라는 거죠. 교회 내에서 기존의 잡지들은 진보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것들이 적잖아요. 연구원에 이사로 활동하는 신부님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으로 표기) 활동을 하시던 1세대 신부님들인데, 그분들은 과거에 당신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정신적 매체였던 「사상계」에 대한 향수가 짙고 그 정도의 형식을 가진 잡지를 꿈꾸셨고, 지금 2세대 신부님들은 좀 더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잡지, 그러면서도「사목」이 다하지 못했던 것들도 한 번 해보자 그러는데, 그래서 세대를 아우르는 작업도 같이 해야 합니다.

기쁨과 희망」 앞에 달아놓은 말이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입니다. 이상적 교회 공동체는 현실적 교회 공동체는 아니거든요. 현실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상이라는 것은 현실과 항상 관계를 맺고 조응하면서 현실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이죠.

사상계의 사상적 담론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사목」의 내용을 아울러서 담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주 어렵죠. 그래서 제가 중간에서, 기획위원 신부님들의 젊은 생각과 이사회에 참석하면서 1세대 신부님들이 원하는 내용을 이어주는 완충 역할을 해야 하죠. 의견을 받아서 전달하기도 하고 제안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폐간된 「사목」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목」의 어떠한 성격을 계승하려고 하는 건지요? 또한 「사목」이 폐간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천교구의 미래사목연구소에서 「사목정보」라는 잡지를 냈습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둘이 전혀 다른 성격인데 둘 다 「사목」을 계승한다고 합니다.

저희도 작년부터 이 잡지를 준비하면서 창간준비호를 냈는데, 차동엽 신부님이 잡지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목정보」가 나와서 놀랐어요. 일단 잡지의 정체성과 독자층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사목」은 열린 사목을 지향하는, 사목자 중심의 성격이 강했잖아요. 「사목정보」도 사목자 중심의 성격이 강한 것 같고. 일차적으로 「기쁨과 희망」은 사제들이 만든다는 장점이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져 있어요. 저희도 일차 독자층은 사목자이지만 「사목정보」와는 달리 일반인에게 열려있고, 일반인에게 다가가는 열린 장으로서 역할을 하려고 하는데, 일반인과 교회와 사회를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 노릇을 하겠다는 거죠. 말하자면 소통을 하려는 건데, 소통이라는 것은 사회와 사회의 소통도 있지만 교회와 사회의 소통 그리고 교회 안의 소통을 고려하려는 거죠. 이게 쉽지는 않겠죠. 그런데 「사목정보」는 이렇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아마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소통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 요즘처럼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교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 거죠?

주홍글씨가 박힌 사람들의 아우성을 담아내는 일, 곧 소통을 향한 첫 걸음

소통은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진행적이고 과정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렇게 소통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안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또 다른 소통의 활로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내놓기보다는 '공동체'처럼 소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논제들을 던져놓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소통에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해요. 일방통행도 소통은 소통이겠지만 그건 진정한 소통이 아니죠.

「기쁨과 희망」 앞에 달아놓은 말이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입니다. 이상적 교회 공동체는 현실적 교회 공동체는 아니거든요. 현실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상이라는 것은 현실과 항상 관계를 맺고 조응하면서 현실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이죠.

말씀하신 대로 소통은 쌍방향인데 우리는 소통한다고 하면서도 일방적인 경우가 많거든요.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소통이 쉽지는 않습니다. 동어반복이지만 진보적인 장을, 진보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을 교회에서 마련해 주지 않았다는 데서 소통이 안 되었던 거죠. 그리고 소위 한 번 찍히면 주홍글씨가 되어 처박혀서 꼼짝 못하게 되는 현실들, 그 주홍글씨가 박힌 사람들의 아우성을 여기서 담아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일방통행이 되지 않고 쌍방향의 진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죠. 예전 「사목」에서는 주홍글씨 찍힌 분들의 글을 싣지 못했을 거예요?!

소위 한 번 찍히면 주홍글씨가 되어 처박혀서 꼼짝 못하게 되는 현실들, 그 주홍글씨가 박힌 사람들의 아우성을 여기서 담아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일방통행이 되지 않고 쌍방향의 진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죠.

「기쁨과 희망」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려는 의지를 가진 만큼, 한국 교회 안에서, 우리 삶 안에서 우리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게 되는데….

일단 태동부터 지금까지 연구원의 중심 행동이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목헌장 1항에 나오는 “기쁨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고뇌”입니다. 세상에서 보게 되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관여해야 되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그리고 교회의 자리를 찾아가는 작업을 하는 거죠. 연구원의 활동은 사목헌장 1항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작업의 일환이지, 딱히 신학의 토착화라는 식상한 표현보다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고민하려는, 그런 것들이 신학적인 사목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학적인 데이터나 베이스를 축적하는 작업도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데 그 작업은 우리 단독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연구원에서 하는 고민들 역시 외부의 도움을 빌려서 또는 심포지엄이라는 형태를 빌려서 같이 공동 작업하는 결과물로 나타나는데, 그런 자료가 좀 더 축적되고 그러면 우리 내부 안에서, 글쎄요, 저는 신학이라는 것이,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신학이 나타나는 게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학파 또는 공동의 작업, 신학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움직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이 있어야 될 것 같고, 어떤 신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현상과 맞닥뜨린 신학자의 고민이 필요한데 아직 그 작업이 한국에서는 있지 않았다는 거죠.

사제단의 신부님들이 모두 신학자는 아니거든요. 사목자로서 어떤 현장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다 신학적인 의지로 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닙니다. 그랬을 때 부족한 부분들을 다른 신학적 고민과 연결해야 하는데, 그것도 저희한테는 쉽지 않은 과제죠.

어떤 담론을 이끌어내고 대중화하려면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기쁨과 희망」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는지요?

   
 
이번 창간호를 보고 교회 내부에서는 ‘동숭동 칼럼’을 가지고 문제 제기를 한 분들이 많아요. 고해성사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했으면 좋았을 건데, 단지 공동참회예절의 가능성만 열어 놨다 그러는데, 그 후속작업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가 드러내는 문제제기나 방향성에 대한 반응이나 비판 그리고 여러 가지 내용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고민하고 심화시키려고 합니다.

일단 ‘동숭동 칼럼’은 필자에게 자율권을 드려요. 그분들이 고민하는 부분을 써달라고 하고, 거기서 나온 고민들에 대한 반향이 있을 때 저희가 긍정적으로 검토 기획을 할 수 있죠. 기획위원회에서 고민하는 것은 특집인데 다음에는 소통에 관해서 다룰 겁니다. 소통과 소통 부재에 대한 글들이 사회, 교회와 사회, 교회 안,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눠서 특집을 다룰 생각인데, 12월 가면 소통과 불통이 큰 이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의 눈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봤을 때 불의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현상 그 자체는 분명 복음정신에 어긋나고 가톨릭 정통 신앙에도 어긋나는 겁니다. 이렇게 윤형중 신부님의 눈으로 봤을 때도, 정통 보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유신헌법은 질타의 대상이 되는 거죠.

창간준비호 발간사에서 이사장 김병상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수구화와 구원의 개인화에 대한 문제를 짚었습니다. 구원의 개인화라는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특성인 연대성과 공동체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답습하는 교회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기대한다

구원을 개인적인 소양,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현상 자체가 자본의 노예가 되는 상태에서는 구원 문제도 개인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가진 현상 자체에 대한 교회의 고민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 모습 그대로 답습하는 교회의 모습 자체도 문제가 됩니다. 그랬을 때 우리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칩니다. 그러나 분명이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필요하고 그 작업은 이 잡지가 지향하는 진보적인 소통,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대안 또는 감시자의 역할, 증거자의 역할과도 연결이 됩니다. 우리 사회를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교회를 올바로 직시하면서 사람들이, 신앙인들이, 소위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모습들,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야겠죠, 그런 작업들을 하면서 사회를, 세상을 올바른 눈으로 보려고 애쓰는 거죠.

그런 점에서 「기쁨과 희망」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문제, 정의에 대한 문제, 평화에 대한 문제, 생명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거고, 정의와 평화와 생명에 대해 같은 한편에 선 사람들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요.

창간준비호 나오고 사람들 반응은 어땠는지요? 다시 창간호가 나오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과 기대를 하던가요?

일단은 기본적으로 고맙다, 좋다 하는 의견이 많았고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색깔을 지닌 잡지가 나온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했어요. 이런 정도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우리 교회가 너무나 소홀히 한 부분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가 과거 같지 않게 사회에 대해서 자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자체가 교회 내부의 울타리를 더 키워 가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그곳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어떤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고 단지 사제로서만 기능하는, 그것은 교회가 내면적인 풍요함을 상실한 채 외적인 풍요만 추구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회에 대해서 더 소리를 낼 수 없고, 교회 스스로 부유해지는….

교회 내부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아요. 너무 정치적이 아니냐. 사회에 대해서 교회가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분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교회의 이런 면을 다시 보게 해줘서 고맙다, 교회 안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좋았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네, 정치적이라는 비난 속에는 교회 안에서도 교회 쇄신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다그침 같은 게 들어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교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그 논의는 우리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오게 될 결과물들을 주시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여기에는 교회 내의 민주화, 교회 내의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같이 하느냐 하는 문제도 포함되는데, 교회 내의 민주화에 대한 부분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한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드러낼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야기한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를 아우르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보다 실천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내용, 개념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가 교회 민주화의 초석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교회 안에서도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런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편 가르기가 문제될 수 있는데, 우리 내부에서도 고민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보나 보수를 교회 용어로 바꾸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보, 보수라는 용어를 교회에서 그대로 쓰게 되면 “아, 이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고민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고, 물론 필요하다면 써야 되겠죠. 그렇지만 우리 안에서 좀 더 다르게, 신앙인들이 소화시켜 낼 수 있는 용어의 개념적인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누가 무얼 하면 한마디로 진보로 모는, 누가 뭐 하면 너는 뭐 하는 식의 극단적인 판단기준, 이런 것도 문제가 되는 것 같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분이니까 진보라고 하고, 교회 옹호 발언을 하니까 보수라는 기준을 세웁니다. 그런데 사실 개인의 삶에서는 진보, 보수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기쁨과 희망」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혼자 외롭게 걸어갈 수도 있지만, 길 가다 동무를 만나면 반갑잖아요. 저 어디선가 걸어오는 동무를 만날 수 있는, 같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어서 내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색깔을 빼고 드러난 알맹이

   
 
제가 이번에 윤형중 신부님 평전을 쓰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윤형중 신부님 같은 경우 정통 보수주의자입니다. 가톨릭 정통 신앙을 지키고자 사신 분이죠. 그분의 순교자적 삶 자체가 가톨릭 정통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순교자 현양 사업도 그랬을 거고, 언론 사업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그분이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유신헌법 이후에 민주화 운동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가톨릭 정통 신앙에서 봤을 때 이거는 아니라는 거죠.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구한다고 합니다. 복음의 눈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봤을 때 불의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현상 그 자체는 분명 복음정신에 어긋나고 가톨릭 정통 신앙에도 어긋나는 겁니다. 이렇게 윤형중 신부님의 눈으로 봤을 때도, 정통 보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유신헌법은 질타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런 분을 현대 한국 사제들의 사표로 제시한 것은 이분이야 말로 가톨릭 정통 신앙을 지키면서도 사회 문제에, 그것도 70세가 다 되어서 세상의 문제에 눈을 뜨고는 다가갔다는 데 있는 거죠. 이게 정말로 놀라웠다고 사제단 원로 신부님들은 그러십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던 시절에 젊은 신부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놀라워하는 거죠.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서 삶의 알맹이, 신앙의 알맹이를 끄집어내는 작업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기쁨과 희망」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에 대한 담론을 계속해서 담아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기쁨과 희망이라는 추상적인 명제가 어떻게 현실적인 명제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현실적인 것들, 상당히 어렵네요. 일단 저는 이 잡지가 맥이 끊이지 않고 꾸준히 나올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해서 연구원이 고민하는 것, 그리고 연구원과 관련해서 사제단이 고민하는 내용을 꾸준히 담아낼 수 있게 폐간되지 않고 나왔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램입니다. 그 안에서 많은 담론들이 오고갔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당분간은 대중적이라고 하더라도 잡지의 독자층은 가톨릭 지성인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고민과 담론을 계속 진행하다 보면 같은 뜻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또한 그런 것들이 사회에서 교회에서 수렴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하여튼 일차 목표는 정간이나 폐간되지 않는 것, 그게 현실적인 꿈입니다. 기쁨과 희망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걸 지켜나가는 것도 우리한테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창간호인데 한 2루타 정도 날린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2루타를 쳤는데 무리해서 3루로 달리다가 죽는 것 아닌가 고민도 해본다고 그랬어요. 하여튼 삼진아웃 되지 않고 2루타 친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다음에는 홈으로 들어와서 한 점을 내야겠죠. 야구 얘기해서 그런데, 그러려면 다음 타자의 도움도 필요하고 여러 명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같이 해나가는 작업들을 더 모색해 봐야죠.

같이 하는 작업을 말씀하셨는데, 비슷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현재에도 많고 앞으로도 많을 텐데, 이러한 의지를 네트워킹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한 의지들을 모아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과 아울러 이러한 작업은 앞서 말씀하신 소통과도 연관되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내용이죠. 저는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의 문제가 소통에 장애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이해, 그 단체에 대한 이해는 충분한 것 같은데 서로가 소통되지 못하는 감정상의 불편함들이 교회 안에서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소통의 장을 위해서 고민을 합니다. 그러한 소통을 위해서 교량역할을 할 필요가 있고, 끊임없이 이에 대한 시도를 할 생각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다 귀국한 지 2년 6개월 되었어요. 앞으로 현실을 좀 더 파악하고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면서 이런 노력들을 끊임없이 해나갈 필요가 있어요.

한국적인 상황을 복음적인 시각으로 신앙의 눈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바탕이 우리 안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쁨과 희망 안에서 그런 것들이 구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램 같은 게 있습니다.

희망을 보는 창, 희망을 보는 눈

잡지를 내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초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저 나름대로 신학적인 구체화에 대해 고민을 합니다. 유럽의 신학과 서구의 신학만 가지고 그 틀에 의해서 사고하고 판단을 내려왔는데, 우리 사회에는 다른 현상이 있고 틀이 있고 신앙심이 있는데, 그들의 신앙심을 대변해 줄 그리고 정리하거나 판단하거나 식별할 수 있는 신학적인 틀거리와 토대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처음 심포지엄을 한 주제가 ‘신앙의 부재, 신학의 부재’였어요. ‘한국 가톨릭 신학의 제자리 찾기’라는 주제였는데, 그게 신앙생활 한다지만 우리한테는 신앙이 부재한 현실로 비쳐졌어요.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이라는 것은 올바른 신학적 바탕 또는 올바른 신학은 올바른 신앙이 바탕이 되는 교환관계가 있는데, 그 중심에는 하느님,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이것이 신학이거든요. 거기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존재의 방향성과도 결부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찾아내는 작업이죠. 그것은 세상의 문제와도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역사적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는,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찾는 거죠. 그리고 이런 것들이 올바른 신앙의 근거를 찾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세밀하고 첨예화된 것들을 신학용어로 바꾸어주는 게 연구원의 역할이겠죠.

그동안의 작업들은 '신앙의 계몽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죠. 분명히 한국 사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신앙, 신학의 부재 이런 것들은 결국 우리가 계몽되지 않고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그랬는데, 깨어 있지도 않고 깨이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현실이 우리가 올바른 신앙의 부재, 올바른 신학의 부재를 초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쁨과 희망」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기쁨과 희망」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같이 고민을 하고 같이 웃을 수 있으면(내용들이 웃기는 쉽지 않겠지만)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문제인식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이상적 교회 공동체를 표방하고 그 틀 속에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창간사 서두에도 나오는데, 길을 걸어가는데 혼자 외롭게 걸어갈 수도 있지만, 길 가다 동무를 만나면 반갑잖아요. 저 어디선가 걸어오는 동무를 만날 수 있는, 같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어서 내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잡지 표지에 있는 동그라미는 희망의 종성에서 가져왔습니다. ㅇ은 희망을 보는 창, 희망을 보는 눈입니다. 그렇게 교회와 세상 그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는 창으로서, 눈으로서 다가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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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오늘 20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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