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박영대]

지난 11월 6일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천주교사회운동 자료와 선배들의 얘기를 통해 어떤 분인지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류 신부님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07년 여름 국제가톨릭지성인문화운동(이크미카) 총회 참석을 위해 케냐에 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우리(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곽은경과 엄기호, 나)를 당신 아파트로 초대해서 불고기와 된장찌개를 직접 요리해주셨다. 된장찌개는 당신만의 조리법이라고 은근슬쩍 자랑도 하셨다. 그때 류 신부님은 나라 사정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들으셨고, 당신이 아프리카에서 보고 느낀 얘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셨다.

류 신부님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곽은경과 엄기호 연구위원은 류 신부님이 아프리카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마치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그 뒤의 간호를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떠났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 뒤 잠깐 귀국하셨을 때 강론을 위해 인천 제물포본당에 오신 류 신부님을 찾아뵌 게 전부이니, 아프리카에서의 두 번 만남을 포함해 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류 신부님을 어른으로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데도 케냐의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던 류 신부님이 다행히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사제가 있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언제 한번 찾아뵙겠다고 연락드렸다. 하지만 그 뒤 병석에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도 찾아뵙지 못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 ‘언제 한번’ 뭘 하겠다는 얘기는 공수표로 끝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류 신부님은 병석에서 자서전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을 내셨다. 대단한 열정이다. 신부님의 자서전은 크게 어린 시절부터 케냐 가시기 전 가톨릭상지대 총장 재임 때까지와 케냐에서 겪은 일로 나뉘어져 있다. 중간 중간 일기가 인용되고, 케냐에서 겪으신 일이 꼼꼼히 기록된 것을 보면, 일기 쓰기는 류 신부님의 오랜 습관인 듯했다. 뜨문뜨문 가물에 콩 나듯이 일기를 적는 나로서는 이 또한 본받을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류 신부님을 케냐에서 처음 뵈었을 때, 은퇴할 나이에 아프리카로 올 수 있는 이 분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하였다. 신부님의 자서전을 읽고 난 뒤 그 해답을 얻은 듯했다. 류 신부님은 사제가 된 뒤 난지도, 영등포 역사 뒤 창녀촌, 필리핀 세계 제1의 쓰레기장 톤도, 필리핀 가난한 마을 바쿰바리오의 본당 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가난한 이들의 현장과 삶을 체험하셨다. 스승 예수처럼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그들의 벗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장례미사에 참석하면서 이 훌륭한 분과 진작 인연을 맺었다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죽음,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최근 들어 ‘질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하려고 애쓴다.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묻고 곰곰이 새겨보는 습관을 기르려고 한다. 막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대학생 시절, 가장 많이 떠올렸던 질문은 ‘이런 경우에 만일 예수라면 어찌 생각하시고 행동하셨을까?’였다. 그 생각이 나서 얼마 전 어느 본당의 견진교리 강좌 때 천주교 신자가 가장 즐겨 먹어야 할 라면은 ‘예수라면’이라는 객쩍은 농담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감수성이 무뎌진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지난 월요일 제1독서 말씀 가운데 다음 구절이 가슴을 헤집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요한묵시록 2장 4-5절)

스승 예수도 평생 질문하며 사셨을 것이다. 그 질문은 상황에 따라 초점을 달리했겠지만 방향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었으리라. 게쎄마니 동산에서 하느님의 뜻을 물었던 것처럼. 어찌 보면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은 해답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도 결국 예수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그분이 가졌던 질문을 찾아내고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일이 예수 제자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제 류강하, 인간 류강하의 삶도 그렇지 않았을까?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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