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아녜스, 60세)

곤지암에서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십수 년 전에 내게 생애의 가장 빛나는 시선을 안겨주었던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에서 간사로 일하던 시절, 그 선배가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누이요 선생이 되어주었던 분인데, 이제 나이 60세의 초로의 길로 접어든 선배. 강변역 앞에서 1113-2번 버스를 타고 곤지암 정류장에 내리자, 벌써부터 나와서 기다렸는지 낡은 검정색 승용차 운전석에서 졸고 있는 선배를 만났다. 옆좌석에 슬쩍 앉아서 깨웠다. 여지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선배다. 정인숙 아녜스.
 


뒤늦게 연애하고 살림을 꾸리고

당시 노동사목 선배 중에는 유난히 ‘아녜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여성 활동가들이 많았다. 박순희 선배도 그랬고, 광주의 최연례도 그랬다. ‘하느님께 봉헌된 어린 양’들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두 사람은 독신으로 있고, 50에는 시집을 가야겠다던 다짐대로 정인숙 선배만 나이 50에 고엽제 환자였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다. 강주관 이레네오. 정인숙 선배가 지학순주교추모사업회에서 일할 때 정의평화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최기식 신부의 주선으로 먹글씨를 받으러 갔다가 알게 된 그 분과 뒤늦은 연애를 시작했다.

강주관 선생은 그전부터 이곳 곤지암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천주교 교리를 교우들이 쉽게 배우도록 천주가사를 지어 교리공부를 시켰던 최양업 신부의 글을 주로 붓글씨로 담았다. 물론 결혼하고서 피차 가진 것 없던 두 늙은 부부는 곤지암에서 신접살림을 꾸리고 지금껏 거기에 살고 있다.

죄 안 짓고 사는 걸로 부족하다

정인숙 선배는 천주교 집안으로 유서 깊은 충북 감곡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충남 예산 내포지방이 치명자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그야말로 천주학쟁이다운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자라면서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신앙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죄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작은아버지가 하시던 작은 공장에서 일하던 정인숙 선배는 그때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알게 되어 신앙인으로 산다는 게 단순히 죄 안 짓고 사는 걸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험악한 세상에 뛰어들어가 잘못된 제도와 구조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신앙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뜻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을 배웠다. 그야말로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선배의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을 동시에 키워주었던 것이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고, 1971년부터 JOC 투사로서 평화시장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것도 그 때 일이다. 이른바 청계피복노조에서 JOC 방식으로 소모임을 꾸렸다.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하리라던 시절

모두가 노조란 빨갱이들이 하는 것으로 알던 시절에, 미싱사들을 중심으로 ‘아카시아회’를 만들고 현장에서 그들이 겪는 서러운 사정을 서로 들어주고 대안을 찾아 다녔다. 작업환경뿐 아니라 관리자들의 성폭력, 욕설이 난무하는 인격모독, 장시간 저임금 노동들을 개선할 방법을 찾았다. 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의식화가 되어 단결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열등감에 시달리던 여성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자존감을 되찾게 해주었다는 점이 가장 기뻤다.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하리라 마음 먹던 시절이다. 1975년에는 JOC 전국회장을 하기도 했는데, 활동이 가장 눈부시던 때였다. 천주교 신부들도 “교회는 억눌리고 빼앗긴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고 지지해 주는 분위기여서 더욱 신이 났던 때였다. 그런데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노동악법이 통과되면서 부산 고무공장에서 다시 서울 평화시장으로 떠다니다가 수배자 신분으로 성남 만남의 집에 정착하게 된다. 베네딕트여자수도회 소속이었던 이영숙 소피아 수녀가 맡고 있던 성남 만남의 집은 이러한 노동자들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노동자들에게 자기발견교육도 시키고, 노동사목 활동가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1984년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가 만들어지면서 사무국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 이후로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민주노조들이 한꺼번에 조직될 때 전국에 퍼져있던 노동사목 집들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어찌보면 민주노총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성모님댁에서 이주여성들을 위해

그후로 ‘지학순정의평화기금’뿐 아니라 늘 마음의 고향같은 ‘전태일기념사업회’ 일도 하다가 최근에 정인숙 선배는 수원교구 방상복 신부가 운영하는 ‘안나의 집’ 안에 있는 건물에서 이주여성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성모님댁’이라는 택호가 붙은 이 집에서 ‘성모이주여성의 집’을 개원한 것이다. 처음엔 이곳에서 탈북자인 새터민들을 위한 일을 하기도 했다. 탈북자들은 보통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를 받은 뒤에 안성에 있는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는 데, 교육 중에 임신을 했거나 출산하게 되는 경우엔 이곳에 보내져 요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선배에게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뭔가 나눌 수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뻤다. 물론 2007년부터는 이주여성들만 대상으로 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도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새터민 여성들이 있어서 틈나는 대로 돕고, 결혼할 때 북에 두고 온 엄마대신 친정엄마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경험도 있다.
 

그동안 이 집을 다녀간 사람들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사람들이 많았고, 그밖에도 몽골이나 스리랑카, 심지어 페루에서 시집 온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다문화(多文化)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네들은 너무도 살기가 어려워서 ‘행복해지려고’ 한국인에게 시집을 온다. 그런데 실상 남편들은 대개 가난하고 나이가 많거나, 의처증 환자인 경우도 있고, 정신지체를 겪는 사람도 있다. 특히 몽골 출신의 여성들은 대졸자들이 많고, 필리핀과 베트남의 경우에도 비교적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을 맞이하는 한국 남성들은 돈 주고 데려왔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배려

한국인 남편들은 이 여성들이 돈 갖고 도망간다는 안 좋은 정보만 많이 갖고 있어서, 이를 예방한다면서 이 이주여성들을 감금하거나 외출을 금지시키고 교육도 받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면 이들도 참는 데 한계를 느끼고, 더군다나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말도 통하지 않아서 결국 폭력이 발생한다. 이른바 이주여성들은 ‘매맞는 아내’가 되어 이 집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정선배의 몫이다. 시부모나 남편을 만나서 상황을 알아보고 알콜릭인 경우엔 치료를 의뢰하기도 하고, 의처증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엔 이혼소송도 주선해 준다. 비자 연장을 대행해 주기도 하고, 상처입은 사람은 치료한다.

비교적 넓은 이주여성의 집 사무실에는 게시판에 일정표가 빼곡하니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엔 예술치료, 미술치료, 춤치료 등 정서적 측면에서 지원하는 부분도 있고, 가장 긴요한 우리말 배우는 시간도 있다. 우리 문화를 익히기 위해서 체험학습도 하고, 하다 못해 전자제품 다루는 법, 요리법, 김치 담구기 등도 가르친다. “나이 50에 결혼해서 벌써 10년차 부부생활을 한 경험이 이 일에도 도움이 된다”고 선배는 말한다. “결혼해서 생활리듬이 정돈되어서 둘 다 더 건강해지고, 부부가 잘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대단한 예술인지 깨닫게 되었다”면서 웃었다. 요즘은 지역에 있는 도척성당에서 성가정운동도 하고, 얼마 전에는 M.E도 다녀왔단다.

더 늙기 전에 내가 경험한 것이 보탬이 되기를

곤지암, 광주시 도척면 그 동네를 둘러서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한동안 ‘도척면765송전탑 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주민들과 한전을 상대로 싸우기도 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지만, 주민들 입장에선 여간 고민스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뭐든지 일이 있는 곳에 내가 간다, 는 마음으로 요즘은 관공서도 다니고 시청에도 나가고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선배다. 광주시내에 나를 내려주면서 말한다. “더 늙기 전에 내가 그동안 살면서 경험한 것이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우리성모님댁 앞에 있는 성모자상이 눈에 스치며 떠오른다.
 

/한상봉 200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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