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김유철]

‘쥑이는’ 세상이다. 

‘쥑인다’는 말은 ‘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끝내준다’는 뜻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언어다. 명색이 작가란 사람이 ‘국격’에 맞춰 서울 지역언어로 품위 있게 사용하지 못해서 미안한 일이지만 잡혀 갈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기는 얼마 전에 G-20 포스터에다 낙서했다고 진짜로 잡아간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쥑이는’ 세상 맞다. 그러자 잡혀간 사람은 그것은 그냥 낙서가 아니라 ‘그라피티’라는 장르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진짜 ‘쥑이는’ 세상이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 심사 때 기소독점권자인 검사가 그랬다고 한다. 그런 낙서행위는 ‘국가의 품격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완존히 ‘쥑이는’ 세상이다. 니미럴~ 

▲ 전태일
평화시장의 봉재공장 재봉사였던 전태일 형은 1948년생으로 쥐띠였다. 형의 몸이 숯으로 변하고 형의 마음은 불꽃이 되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되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법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이른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형이 준법을 요구하고 길을 떠난 세월이 40년이다. 국가의 품격을 다루는 자들은 낙서와 그라피티 사이에서 길을 잃고 ‘엄격한 형 집행’을 들이대고 있다. 형은 쥐띠였지만 쥐처럼 살지는 않았다. 쥐는 다니는 곳곳에 허물어질 구멍을 뚫었지만 전태일은 허물어져야 하는 벽에 구멍을 뚫었다. 그것이 쥐와 쥐띠가 다른 점이다. 

우리가 말하는 육십갑자를 기원전이 아니라 기원후부터 적용한다면 예수는 쥐띠다. 예수를 기원(紀元)으로 보자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예수 역시 짧은 3년 남직한 공생활 동안 법을 들이대는 학자와 정치인들과 관료들과 성직자들과 어중이떠중이 꼴통들을 향해 사람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늘이 말하는 법을 지키라고 요구했었다.

예수는 그의 목을 요구하는 자들 앞에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충족이 아니라 그것을 부르심으로 여기며 십자가 위에서 하늘을 목 놓아 불렀다. 완전히 이해 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사랑해야 할 일은 늘 가슴이 아픈 법이었다. 쥐떼는 피리소리를 들으며 흐르지 않는 강물로 들어가 사라졌지만 예수는 흐르는 강물에서 세례를 받고 그 강에서 제자를 만나 강물을 걸어서 하늘로 갔다. 그것이 쥐와 쥐띠가 다른 점이다. 

모든 일에 심각 찬란한 자들이 법을 만들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법이 공평하게 적용되기를 염원했다. 공정(公正)이전에 공평(公平)한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우선인 것이다. 절묘하게 군대를 안가고도 고관대작을 하는 자들에게는 병역면제라는 법이 양심상 군대를 안가는 사람들에게는 병역기피라는 법으로 돌변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쥐들끼리 사는 세상에서나 벌어져야 하는 일이다. ‘쥑이는’ 세상이다. 

너는 쥐냐? 나는 쥐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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