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교회쇄신을 위한 근원적 성찰-4]

가치 지향적, 질적 교회가 되어야

한국 교회는 속된 표현으로 현재 호황기를 맞고 있다.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또는 비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신자 증가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름대로의 긍정적 평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적 증가에는 필연적으로 질적 저하가 따르게 마련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이른바 신앙의 관용령에 의해 종교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지하의 박해 상황에서 대낮의 교회로, 황제의 비호를 받는 제국교회로 성장했지만, 성장의 반비례로 교회가 때묻고 속화(俗化)된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교회를 오히려 영적으로 퇴조했다는 뜻에서 이른바 쇠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박해 시대에 고통당했던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적응이 빠른, 권력 지향의 상술인(商術人)들이 제국 교회에서는 훨씬 더 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250년을 전후하여 싹텄던 은수적 삶과 수도원 유형의 삶이 복음에 충실하려는 신앙인의 의지가 표출되었고, 4세기에는 교회가 황금기일 때, 뜻있는 신앙인들은 이른바 복음 3덕의 삶, 가난, 순결, 순명이라는 그리스도의 철저한 비움과 봉사, 투신의 삶을 자원으로 선택하여 물량적인 무게에 짓눌린 당시 교회에 영적인 풍요로움과 신선한 바람을 제공한 것이다. 수도회는 체계적 교회 쇄신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기형적이다. 왜 그리스도인인지, 왜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근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과연 믿음이 신앙인의 전인적 결단의 결과인지 의문스럽다. 신앙은 문화적 삶의 선택과 유사하게 비추어지며 어느 종교 단체의 일원이라는 귀속감에 불과하다. 병든 사회, 불의한 현실에서 교회는 치유자이기보다는 같이 병들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가 병든 그만큼 교회도 나쁜 영향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주의, 물량주의, 황금주의, 인간 경시 및 권력 지향의 기회주의 등이 그대로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신자는 어쩔 수 없이 타협주의에 빠지고 교회는 일종의 혼합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실이다. 믿음의 가치, 예수를 추종한다는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두운 현실에서 목숨을 걸로서라도 분명한 선택의 결단을 내리는 신앙인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신자들 중 그 얼마가 쇄신의 긴박성을 감지하고 있는가. 본당 내의 많은 단체들,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성령 운동, 부부 모임, 성모회, 사목회...... 이 단체와 회원들이 철저한 소명 의식에 불타 있는가. 강도 당한 이웃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로사리오 27일 기도, 54일 기도를 바치다가 하루라도 거르면 큰일이나 나는 줄 알고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는 너무나도 미숙한 상태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어느 성모상에서 흘러나왔다는 눈물에 더 쏠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회개를 다짐하지보다는 태양이 빙빙 돌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등 참으로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비성서적 삶의 장본인들은 아니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인 것은 자명하며 사도 바오로가 이를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성역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공직자, 관리, 장관이란 사람들이 정부의 법 앞에서는 그 어떠한 성역도 없다고 외치고 있으니, 도대체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인간은, 성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한때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자라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겉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일 뿐, 사실상 무신론자와 똑같은 가치와 이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되묻고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우선으로 하는 가치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가. 우리가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 아닌가. 따라서 서로의 유기적 관계를 확인하는 형제적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의 믿음과 교회는 참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방식과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생활양식에 물들어 있다. 세례받은 자신,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신이 이루는 종교적 삶의 양식이 있고, 사회와 직장에서 타협하며 무신론자와 같이, 유물론자와 같이 생활하는 철저한 비그리스도교인의 생활 양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 여기서 바로 세례 때의 그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면서 우리는 비그리스도교적인 비인간적인 가치와 이념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 결단을 통해서만 교회가 쇄신되고 세상이 밝아진다. 

거짓 권위를 벗어야

교회론을 할 때 초기 교회에서는 흔히 주교 중심의 교회론과 성체 중심의 교회론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교(사제)와 성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결코 분리하여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교부들의 사상 변천과 진전 과정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렇게 일단 구분한다.

주교 중심의 교회론이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기초를 둔 것으로, 사도 교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두드러지게 강조한 내용이다. 당시 박해 상황에서 가현론 등 이단이 함께 교회를 어지럽혔을 때 참 믿음과 진리의 교회에 머물러 있다는 기준과 근거는 바로 사목자였다. 때문에 이냐시오는 순교에 앞서 집필한 7통의 서간 곳곳에서 한결같이 주교의 수직 임무를 상기하면서 주교는 일치의 보증이며 지역 공동체의 핵심임을 역설했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교 군주제라 칭한다. 반면 디다케의 교회론은 성체 중심의 것으로 거기에는 주교와 부제의 선출만 언급되어 있을 뿐 전례와 가르침 등은 모두 예언자 중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디다케는 예비자들을 위한 길잡이이며 새 영세자들의 생활 지침이기도 하다. 즉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의 길 등, 세례받은 신앙인이 택하고 걸어야 할 길과 실천해야 할 규범을 담고 있고 특히 성체 중심의 공동체적 삶이 강조되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저하게 성체 중심의 교회론을 주창했다. 즉 사제와 주교는 신품성사상 똑같은 신분의 사람들이고 다만 직책상 곧 관할권에 있어서만 구분된다고 가르쳤다. 사실 사제와 주교는 모두 미사성제를 통한 성체를 이루고 있다. 성체가 현존한 그곳,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가장 유력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으로 높게 평가받아 왔었다. 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들의 동료성(Collegialitas Episcoporum)이 강조되다 보니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되었던 교황 중심의 교계와 교회론이 시대적 성숙과 요청에 따라 주교들의 동료성과 연대성 안에서 이해되면서 상대적으로 주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언급된 주교(감독, episcopus)란 직책과 사제(장로, presbyter)란 신분에 대한 내용 규명에 있어서는 계속 성서-신학적 연구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2세기의 필립비 교회공동체는 주교가 아닌 일단의 사제들에 의하여 사목되었으리라는 추정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오늘의 교구 및 교구장 제도는 현실적으로 부적합할 뿐 아니라 성서적 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깊이 재고해야 할 숙제이다. 지금도 물론 만 75세라는 교구장 은퇴 연한이 정해져 있어 이것도 교구장 주교 종신직보다는 진일보한 분명한 쇄신의 조치이긴 하지만 이제는 과감히 교구장의 임기제를 실천해야 할 때이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교구장 임기제가 제도적으로 실천되기 전에 주교들 스스로 교구장 임기제를 주창하고 일정한 연령이 지나면 용기있게 사임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구장 임기제가 가능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는 모형을 우리는 수도원의 양식과 삶에서 볼 수 있다. 어제 총장이었던, 어제 원장이었던 장상이 오늘은 평수도자와 함께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는 그 자체가 웅변이며 겸손의 거울이기도 하다.

오늘의 교구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교회 내의 쇄신의 선구자인 수도원 삶의 양식이 보완해 주고 지탱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1973년에 전주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981년에 사임한 김재덕 주교를 기억할 수 있다. 그의 사임이 자의, 타의, 정치적 배경 등 여러 관점에서 추정되고 논란된 바 있었지만 어쨌든 사임을 스스로 택한 결단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당시 전후 여러 사정을 종합할 때 김재덕 주교의 사임은 한국의 동료 주교들에 대한 권고적 의미의 교훈이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귀감이라 생각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자전적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첫머리에서 사람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로서, 모든 불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 유형지의 극한의 고통, 죽음 앞에서의 극단적 상황에서 발휘된 초인적 힘을 그는 몸소 체험했고 또한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초인적 체험을 우리는 다른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자녀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불사한 부모들의 헌신적 행위가 바로 이를 말해준다. 사람의 초인적 힘이란 결국 사람 안에 내재한 하느님의 구체적 증거가 아닐까.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 때문에 순교가 가능하고, 완덕에의 오름이 가능한 것이다. 복의 예수는 우리에게 무한을 요구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다.” 완전한 이상 실현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의무인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상 실천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수백 번 주의 기도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의지의 반영이어야 한다.

기성인들의 특징은 안주(安住)와 포기이다. 흔히 지혜문학적 염세 사상을 기초로 하여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느니 역사는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느니 하면서 이상에 불타 젊은이들에게 기성인들은 오히려 걸림돌을 놓기 일쑤다. 이보다 더 큰 불신과 죄가 있을까. 예수는 하느님의 이상 실현 자체였으며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이상 실현의 가능성을 확신했기에 기쁘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쇄신과 결단이 가능한 것이다. 뜻있는 신앙인들이 교회 쇄신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숨차게 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교회는 신비체 곧 성장하는 몸이다. 성장하는 과정에는 변화가 있게 마련이고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성숙을 위하여 거쳐야 할 위기, 위험, 모험 등이 있다.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도, 쓰디쓴 실패를 맛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발걸음은 필연코 목적을 완수시킨다. 구원, 하느님 나라, 이상적 공동체 실현을 위한 신앙인의 노력은 그래서 끝없이 반복되는 쇄신 운동이다. 따라서 교계 제도 또는 제도로서의 교회는 결코 평신도들의 자발적 운동과 자생적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다양성은 교회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이다. 복음을 보더라도 열두 사도 외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실천했던 사도들과 다른 부류의 추종자들이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을 붙잡아 고발한 유다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가믈리엘이 오히려 인위적으로 사도들에게 제재를 가하기 보다는 자연적 결과에 맡기자는 여유있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사실에서 현실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가치관, 하느님 나라의 개방성, 예수의 보편 사상이 교회의 특징이어야 하며 교계 제도의 실천 기준이어야 한다.

예전에 주교회의에서 몇 차례 언급된 바 있는 “공인(公認)되지 않은 단체는 천주교란 말을 쓸 수 없다”는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이다. 가톨릭이란 결코 법적으로 제재될 칭호가 아니다. 그것은 법 이전에 세례받은 신앙인이 선택한 공동체이며 만인이 공유할, 이름 그대로 보편적인 가치이다. 스스로 천주교에 속함을 선언하는 것은 공적 고백인데 어떻게 신앙 고백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가.

공인(公認)의 기준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 성실한, 거듭거듭 회개하는 무리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신앙인 개개인의 자유와 특은을 기초로 한 다양성 위에 세워지며 예수를 머리로 하기에 늘 하나인 것이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는 성장하는 몸, 움직이는 몸에서와 같이 동적인 요소를 지닌다. 법 중심의, 권위중심의 교계 조직에 어느 젊은이가 이러한 물음을 던졌다. “주교님, 순교할 때에 주교님의 공인이 필요합니까?” 

시대의 표징을 읽는 교회

시대의 표징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상황을, 시대를 진단하는 작업이다. 복음의 예수는 시대의 표징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말씀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교회의 위치와 시선을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세상, 사회, 현실을 똑바로 보고 바로 그곳이 교회가 처한 자리임을 역설했다. 한국의 시대 표징은 무엇일까? 각자 나름대로 많은 것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오늘날,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에 도전의 가치를 제시한다. 역사 의식, 민족 의식, 현장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참으로 이것이 우리 교회의 과제요 의무이다. 참된 의식은 시대의 표징을 읽게 하며 시대의 표징은 교회 구성원들의 동등성, 동료성을 확인해 준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 아멘.”

함세웅 /신부, 청구성당,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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