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6년동안 갈멜수도원에서 관상하는 수도자로 살아
-기도의 힘으로 정치를.. 천주교연대 사제들에게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한다

“물이 가는 모습, 물의 상태를 표현한 법(法)이라는 글자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 차오르는 물의 모습으로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으로서 가야할 나의 길입니다.” 강기갑 의원의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지난 10월 26일 오전에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227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환한 사무실에는 분주한 보좌관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강 의원과 기자는 녹차를 한 잔씩 받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 농민운동을 만나다

▲ 강기갑 로베르또 의원
강기갑(로베르토, 58세) 민주노동당 의원. 어릴 적부터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시작해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던 아버지의 4남 4녀 중 일곱째, 셋째 아들로 1953년에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공무원이나 상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근면하고 성실하게 땅을 대하는 부모을 보면서 농사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농업학교에 진학했고, 산에서 농장을 일구며 억척스럽게도 일했다. 그러다가 1976년 당시 본당신부이자 가톨릭농민회 경남본부 초대 지도신부였던 임상협 신부를 통해 마산교구 가톨릭농민회를 만나 세상에 눈떴다. 30여년 간 그가 몸담게 될 농민운동의 시작이었다.

생활공동체, 생명농법 등을 지향했던 가톨릭농민회였지만 1970-80년대에 농민운동을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길이었다. 농민운동가들은 모두 사상범으로 몰리는 것은 물론, 농촌 자체가 농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탄압을 받았지만, 가족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가족들마저 농민운동을 그만 두라고 종용했다. 그래도 그만 둘 수 없었다.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부의 탄압 덕분에 오히려 농민운동은 인권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권익운동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1990년에는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등 각 부문 농민운동을 규합,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만들어졌고 강 의원은 전농과 가톨릭농민회 양쪽 활동을 모두 해나가면서 통일문제와 사회적 구조문제에 대해 더 넓게 배워갔다.

그런데 농민운동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농민들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강기갑 의원은 그 당시 "'농민운동 왜 하나?' 하는 회의도 생기고, 농민들에 대한 미움도 생겼다."고 말한다. "농민운동가가 농민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활동하는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없애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 한때 침상으로도 쓰였던 강 의원의 자리에는 멍석이 깔려 있다. 그 위에 앉아 이따금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그가 행하는 관상의 일종일 터.. (사진/한상봉 기자)

천상 농사꾼에서 수도자의 길로..다시 세상으로 

강기갑 의원은 예수성심시녀회 수녀였던 넷째 누나의 영향으로 1973년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로베르토. 본당활동을 하던 중 어느 날 사천본당의 한 수사를 소개 받았다. 갈멜 수도원 수사였는데, 몸이 아파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정대식 수사를 본당 수녀가 강기갑 의원에게 소개해 주었다. 당시 농민운동에 대한 회의와 농민들에 대한 미움으로 힘들어하는 강 의원에게 그분은 “세상 구원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로도 세상과 소통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갈멜 영성에 대해 알려줬다. 그때 많은 감화를 받은 강 의원은 수도성소에 대해 고민하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결국 수도자의 길이 옳다고 생각한 그는 1982년 31살 되던 해 6월 15일, 갈멜 수도원에 입회했다.

갈멜수도원에서 약 6년 간 수도자로 살았다. 수도원에서도 공동체 밭을 혼자 전담하면서 농사를 지었고, 농민들과도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종신서원을 앞두었을 때, 수도원 장상들은 그를 두고 ‘수도 성소는 있으나 갈멜 수도원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강 의원은 그 길로 수도원을 나오게 됐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굽힐 줄 모르는 내 고집 때문”이라며 웃었다.

1987년 수도원을 나와 다시 농사꾼이 되었고 농민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가톨릭농민회 마산연합회 회장도 맡았다. 그러면서도 수도성소에 대한 마음은 버리지 않았고 기회도 있었다. 수도원 생활 당시 함께 했던 분이 프랑스의 갈멜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 강 의원더러 함께 가자고 권했고, 수도원의 초청장과 비자도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하고 있던 일들이 그를 잡았다. 농촌총각장가보내기운동의 책임을 맡아 막 일을 시작하던 참에 어찌할 수 없었다. 마침 농민회 실무자를 맡고 있던 박영옥(엘리사벳)을 만나 1991년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고 지금은 3남 1녀의 아버지다. 자녀는 열명 쯤 낳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고. 주시는 대로 낳은 덕분에 늦둥이 막내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이다.

▲ 강기갑 의원은 자신이 과격 이미지로 비출까 염려했다. 기자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첫 마디가 "저, 생각보다 부드러운 사람입니다"였다.(사진/한상봉 기자)

정치는 상생을 위한 것, 흐르는 물처럼 간다

강기갑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에 농민후보로 출마하게 되면서부터다. 농민이 아무리 외쳐도 소외당하고 선거 때만 표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이제는 농민이 정치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정책 입안자로 참여해 정치세력화 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은 각 부분별 후보를 내기로 하면서 농민후보를 찾고 있었다. 당시 강 의원은 전농의 부의장이었다. 현직 임원은 정치후보로 나설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데다 쌀수입 개방과 WTO 투쟁 등으로 실형을 받았는데, 항소시기를 놓쳐 형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보로 나설 만한 사람들 역시 모두 실형을 받은 터였다. 그런데 마침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강기갑 의원이 사면을 받게 되면서 물꼬가 트였다. 전농 임원들은 강 의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농민후보를 찾지 못하던 민노당은 후보등록 시기를 연장하면서까지 후보를 찾고 있었다.

당시 강 의원은 '흙사랑 농장'을 운영하면서 젖소를 100마리 정도 키우고 있었는데 젖소는 전문기술이 필요했기에 농사일을 놓을 수 없었고 가족들의 반대도 심해서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 후보등록 마지막 날 오후 5시에 후보등록을 했고, '감사하게도' 당선이 됐다. 강 의원은 그 때 심경을 이렇게 말한다. "당선이 되니, 삽으로 흙 퍼내듯, 어느 날 갑자기 국회란 곳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고민도 많았지만 농장은 장인어른과 이웃들이 도와주는 덕분에 의정활동을 겨우 하고 있다."

처음부터 정치나 국회의원의 역할에 대해 준비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회위원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정치는 상생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서에서도 의사가 건강한 사람이 아닌 환자를 위해 있다고 했듯, 정치나 국회의원의 역할은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입니다. 이 法(법)이라는 글자는 물 수(水)에 갈 거(去)자가 만난 것이잖아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아래로부터 채워집니다. 가다가 막히면 채워져서 수평을 이뤄요. 이것이 물이 지니는 상생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은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회는 그런 의미에서 떠나있고, 가진 사람들을 위한 법을 만드는 곳입니다.”

문제투성이 국회 안에서 강기갑 의원의 의정활동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저는 특히 농민들을 위해서 일하려고 들어왔는데 좌충우돌,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구조적 문제에 너무 많이 부딪쳤고, 그러다 보니 굉장히 화가 나고 마음에 안드는 것 투성이고, 답답하니 소리를 치게 되죠. 원래 성격이 아닌 것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굴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과격한 인사로 분류가 됐지요. 국회에서는 논리적인 설득이 필요한데, 아무리 준비를 해도, 회의하다 보면 책상을 뒤집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동료 의원들이 미워지고 용납이 안되고 그랬습니다.”

강 의원의 첫 단식은 이라크 파병과 쌀협상 문제 때문이었다. 그때 13일간 단식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동료 의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그 미움을 없애기 위해 기도했습니다.단식하면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곳 앞이 국회 본청 공원이었는데, 밤이면 묵주기도를 하면서 공원을 돌았습니다. 마음속의 미움이 없어질 때까지. 12월이라 너무 추운데, 미움이 가시지 않으니 멈출 수도 없고. 나무하고도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마음 가라앉으면 들어오고 하기를 13일 정도 하니 미움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감사기도 하고 단식을 정리했는데, 그때 이후로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아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물론 싸우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것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거나 대인관계에 문제를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미움보다는 측은하기도 하고,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 그는 여전히 수도자로 살고 있다..정치를 통해 하느님나라를 이루고 싶어하는.. 강기갑 의원은 수도자로 6년을 꼬박 살고 나서도..다시 수도원행을 꿈 꾸었다. ..아이들을 넷이나 낳고도 자신이 사는 현장을 수도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진/한상봉 기자)

정치인이 아닌 신앙인의 정치, 더 낮은 곳을 향해서 갑니다

강 의원의 방은 다른 의원실과 달리, 좌식으로 꾸며져 있다. 작은 책상 옆에는 손수 밥을 해먹는 전기밥솥도 하나 놓여있다. 17대 때는 의원실에서 숙식을 했는데 호되게 몸살을 앓은 이후로 숙소는 다른 곳에 마련했다. 1일 2식을 하다가 최근에는 1일 1식을 하고 한복을 입는 이유도 무엇보다 몸을 정갈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매일 아침 저녁 두 시간 씩 묵상을 했던 습관이 몸에 배어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영성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활동이 기도 속에서 이뤄지기를 갈망했다. 처음 의원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강 의원은 아침에 꼭 한 시간씩 묵상하고 매일미사 책으로 그날의 말씀을 읽으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아침에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분 마음과 하나 되기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그 힘으로 하루를 살지요. 특히 회의가 있을 때는 더욱 찐하게 합니다. 국감 같은 것 할 때는 화내지 않으려고 묵주를 쥐고 들어갑니다. 저는 정치인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정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 하나하나를 영성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고 할 수 있도록 노력해요. 그렇게 하면서 영성생활과 기도가 더 단련됐고 풍부해진 것 같습니다.”

강기갑 의원은 의정활동을 하게 되면서 기도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다. 예전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하느님과의 내면적 일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상처와 고민을 넘어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에너지를 더 많이 쏟아붓는다. 그래서 가능한 더 많은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보고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자리로 삼아 기도하고 의정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교회, 권위에 대한 경계와 기층민에 대한 포용 필요

▲ 강 의원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여러차례 허공에 눈길을 주곤 하였다.(사진/한상봉 기자)
강기갑 의원은 가톨릭신자로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역시 통감하고 있다. 교회란 이해관계를 떠나서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심없이 발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민중을 고통받게 하는 구조적 모순이 굉장히 많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이런 구조적 모순과 괴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개선하기 위해 열정을 가져야 해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마음을 바꾸려 노력해도 구조적 모순을 바꾸지 못한다면 고장난 차가 질주하면서 계속 사고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차에 치여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차를 멈추게 해야죠. 그런 역할은 신앙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힘이 있는데도 제 역할을 하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교회 역시 중산층화 되어서 중산층을 위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듯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권위주의 역시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교회는 좀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아내가 저에게 권위의식이 많이 늘었다는 지적을 합니다. 철저한 자기 노력이 없이는 모르는 사이 권위적이 되고, 높은 이들만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교회가 자신의 역할과 소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이 사회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기층민중을 끌어안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제도적 모순과 구조적 모순을 바로 잡아나가는 데 역할을 하게 되지요.”

4대강은 하느님의 이 시대에 주신 십자가. 최선을 다 하고 그 분께 맡길 것 

천주교회에서 한창 벌이고 있는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에 대해서, 강기갑 의원은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 부끄럽다"고 말한다. 이어 "4대강 사업 문제는 풍요롭고 편리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성공만을 지향하고 질주하는 가치관, 미래와 사회 전체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부른 결과"라면서 "4대강 문제는 공동의 책임이자 ‘내 문제’여야 한다"고 말한다.

“4대강 문제는 우리시대에 하늘이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분노스럽고 안타까운, 그런 십자가지만 감사히 받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엄청난 책임을 느낍니다. 저는 정신의 힘을 믿는데,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와 그 마음의 얼마만이라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도력을 통해서라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매일 한 시간 동안 하는 기도 중에도 다른 생각이 드니, 그만큼 간절함이 부족한 겁니다. 기도와 간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 또한 저의 몫이고 책임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럴 수 있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참 어렵습니다.”

현재 강기갑 의원은 4대강 사업을 막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최선을 다해서 계속 해야겠지요. 하느님의 힘과 승리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4대강 사업 예산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합니다. 정부는 4대강 예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응하라는 지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번 국회 예결위에서 그 사람들과 또 싸우게 되겠지요. 끊임없이 싸울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하는 것을 제물로 받아 섭리하시도록 맡겨야겠지요. 그 분께서 어느 순간 한방으로 날릴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강의원은 갑자기 녹취기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이렇게 외쳤다. "신부님들 힘 내십시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를 통해 매일같이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을 향해 던지는 지지와 연대의 한마디였다.

인터뷰/한상봉 기자
정리/ 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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