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 소설-6] 동행-유다와 예수

▲ 동행-유다와 예수
새벽녘이 되어 지도부는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이곳의 몇 동료들만 우두커니 앉아서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다시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넓은 분지는 모두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공사장 이곳저곳에 노동자들이 쳐놓은 임시 움막들이 가득했다. 움막 주변엔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과 얼굴색이 누렇게 뜬 아이들이 기어 다녔다. 그는 급하게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하루일과가 시작 된지 한참이 지난 후라서 일을 배당 받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공치는 날이었다. 이곳 공사장에서 빈둥거리다가 십장 눈치를 보아가며 점심이나 얻어먹자는 생각에 공사장을 떠나지 않고 숲이 우거져 있는 언덕 아래로 걸어갔다.

저쪽에서 큰 항아리를 등에 맨 아낙들이 힘겹게 걸음을 떼며 걸어왔다.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역청을 나르는 아낙들이었다.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중 낯이 익은 한 아낙이 그를 보면서 눈으로 맞은 편 언덕을 가리켰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낙이 그를 쏘듯이 쳐다보면서 휑하니 스쳐지나갔다.

십여일 전에 맞은편 언덕 아카시아 나무 숲 뒤에서 그에게 몸을 팔았던 여인이었다. 어스름한 밤이었다. 일을 대충 끝내고 바지춤을 올리면서 그는 아낙에게 빵 한덩어리를 주었다. 아낙은 빵을 품속에 소중하게 집어넣고 그를 향해 멋쩍게 웃으면서 손가락 세 개를 펴 바로 옆의 올리브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사흘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신호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올리브나무 아래 폈던 작은 담요를 돌돌 말아서 옆구리에 끼었다. 그녀가 주위를 살피고 나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언덕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그가 역청 항아리를 지고 가는 아낙들을 한번 더 힐끗 뒤돌아보고 나서 숲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밤새 마셨던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았는지 몸도 머리도 무거웠다. 나무그늘 아래 윗옷을 깔고 누웠다. 나무를 다듬는 연장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대패질 소리, 나무망치로 문틀 각을 맞추는 소리, 송곳을 비벼 나무를 뚫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멀리서 돌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도 끼어들었다. 나무판을 한 꺼풀씩 조심스럽게 깎아내는 대패 미는 소리가 다정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 아낙의 사타구니에서 풍기던 비릿한 냄새가 어느새 그의 코 밑까지 따라왔다. 입을 다시며 눈을 감았다. 그는 곧 코를 골면서 깊은 잠에 들었다.

그가 늘어지게 자고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을 훨씬 넘어버렸다. 오후의 강렬한 햇빛 때문에 눈살을 잔뜩 찌부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쪽 한켠에 귀한 목재들이 쌓여있고 그 앞에서 앳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가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여기는 궁 안에 들어갈 가구들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청년이 대패질을 멈추고 손으로 방금 대패질을 한 나무판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그가 만족한 표정을 짓고 대패를 놓더니 가느다란 숯을 들었다. 대패질이 끝난 나무판에 무엇인가를 쓱쓱 그렸다. 그리고 끌로 파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였다.

끌로 나무를 깎아내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렸다. 끌로 파낸 작은 나무 조각들을 날려버리려고 청년은 간혹 양 볼을 둥글게 부풀려 바람을 훅훅 불었다. 끌을 움직이는 그의 손길이 적당한 탄력을 유지하면서 나무의 결을 잘 찾아 따라갔다. 끌이 나무를 먹는지 나무가 끌을 먹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손놀림이 정교했다. 그는 청년의 섬세한 손길에 넋을 빼앗긴 채 쪼그리고 앉아서 유심히 쳐다보았다. 청년이 일하다 말고 가끔 고개를 들어서 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때 마다 청년의 눈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뒤쪽 그늘막엔 청년의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흙 위에 주저앉아서 작은 나뭇조각들을 요리조리 옮겨가며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 그림/홍성담

끌로 새기는 일이 모두 끝났는지 청년은 허리를 한번 펴고 나서 방금 새김질이 끝난 나무판을 사포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청년이 나무판을 들여다보며 사포에 갈린 나무먼지들을 길게 후욱 불었다. 나무판에 새겨진 돋을새김 문양이 햇빛아래서 음영을 드러냈다. 가운데에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쌍어문이, 그 주변 가장자리엔 로마식 아라베스크 문양이 길게 뻗었다. 그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밀자 청년이 나무판을 보기 쉽도록 들어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 미소를 띤 눈으로 찡긋했다. 유다도 청년에게 씩 웃어 보였다.

뒤쪽에서 놀고 있던 어린 소녀가 오빠를 불렀다. 청년이 뒤돌아서서 흙바닥에 주저앉은 동생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무슨 말인가를 하며 잠깐 놀아주는 듯 했다. 그는 동생 앞에 흐트러진 나무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둘 쌓아 보이면서 이곳 작업반장의 눈치를 보는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여자아이가 뭔가 불만인지 칭얼거렸다. 청년이 일어나서 그늘막 기둥에 걸어놓은 윗옷을 더듬어 딱딱하게 굳은 빵을 꺼내 동생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서 방금 새긴 나무판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유다의 눈길에 환하게 웃어보였다.

유다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아침도 굶고 점심도 넘겨버린 시간이라서 몹시 배가 고팠다. 여자아이가 딱딱한 빵조각을 입에 물고 열심히 뜯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다는 더욱 배가 고팠다. 그는 새벽까지 마셨던 술이 이제 깨는지 한꺼번에 우울증이 몰려왔다. 강하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이 그늘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 명암의 명백한 차이가 너무 우울했다. 하늘과 땅이 갈라져 서로 멀리 마주보고만 있다는 것이 우울했다. 청년은 새로운 나무판을 작업대 위에 고정해 놓고 대패질을 시작하면서 가끔 오른손으로 자신의 배를 쓸었다. 청년도 역시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청년이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다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청년은 대패질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 걸어가는 유다의 모습을 조용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몇년전의 세금저항 반란이 잔인하게 진압된 이후로 이곳 사람들은 모두 헤로데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저 청년도 헤로데 궁에 들어갈 가구를 만드는 노역으로 식구들의 입에 겨우 풀칠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유다는 조만간에 따로 시간을 내어 저 청년을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그늘막에서 청년의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칭얼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엔 어제 밤새 내내 자신의 무능함을 다그쳤던 예루살렘 젤로트 지도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다의 발걸음이 몹시 휘청거렸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훤칠하게 성장한 후에도 당시 청년시절의 조용한 미소가 남아있는 그이를 다시 만난 것은 유다가 요한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던 요르단 강가의 아파스 바위 아래였다. 그러나 그 어린 청년이 그이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은 지금부터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어린 청년이 그이인줄도 모르고 다시 만난 것이 바로 6년전 이었다. 그 세월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홍성담
/ 안토니오, 화가

 

 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광주 자유 미술인회' 조직에 참여했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1983년에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미술대중화운동에 힘써왔다. 
  1984년에 광주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 ‘새벽’을 제작했고,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한국작가, 1999년 개인전 ‘脫獄’을 서울 평창동 가나화랑에서 그리고 2004년 개인전 ‘假花’를 학고재화랑에서 가졌다. 
최근에는 일본과 동아시아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연작 ‘야스쿠니의 미망’으로 일본, 한국, 독일등에서 전시했으며, 2010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 초대전 ‘흰빛 검은물’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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