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 소설 -5] 동행-유다와 예수

▲ 동행-유다와 예수
어떤 부드러운 손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그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손은 유다의 붉은 구렛나루를 스쳐 올라가 귀 바퀴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이 편안함을 한 순간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 채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손이 다시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어디서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그리고 어떤 우악스러운 손이 그 부드러운 손을 그의 가슴에 밀어붙이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았다. 쇠못 예리한 끝이 그이의 손목을 뚫고 그의 가슴 명치끝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아무리 악을 내질러보려 했지만 중치가 막혀 모기소리 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건초냄새에 섞여 침향과 몰약 냄새가 명주실처럼 가늘게 연한 보랏빛 선을 그으며 풍겨왔다. 보랏빛 선을 조금이라도 빗겨나면 시체 썩는 퀴퀴한 냄새로 변했다. 그는 자신이 무덤정원에 잠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 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던 그 손이 눈에 익었다. 손 매듭이 길쭉하고 하얀 것이 분명히 그이의 손이었다.

유다는 크게 발버둥을 치면서 겨우 눈을 떴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을 배경으로 목이 없는 사람이 허리를 숙여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털로 만든 옷을 어깨에 걸친 요한의 몸둥이였다. 유다는 누운 채 겨우 입술만 달싹이며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은 가끔 왜 이런 모습으로 꼭 저에게 나타나십니까’
잘려진 목에서 붉은 피를 솟구치면서 요한이 말했다.
‘간혹 너희들이 보고 싶었다’
‘선생님. 못난 우리들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허무하게’
‘그런 것인가, 아니다. 이제부터 항상 다시 시작할 뿐이다’

메뚜기 세 마리가 요란하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와 요한의 잘려진 목에 앉더니 솟구쳐 오르는 붉은 피를 빨았다. 그가 뒤돌아서 성큼성큼 밤하늘을 걸어갔다. 초롱초롱한 별빛들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밤하늘로 걸어가는 그를 좇아 유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까 빈속에 들이킨 술기운 때문에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상현달이 아직도 이마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자정은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 그림/홍성담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급하게 뚝 떨어졌다. 술병을 찾아 바짝 마른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른쪽 건너편에 있는 요셉의 가족묘를 바라보았다. 바위로 막아 놓은 저 동굴 속에 그이가 하얀 천에 둘둘 묶인 채 누워 있을 것이다. 그이와 함께 해왔던 많은 일들이 모두 허무한 짓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결국 허무하게 끝났다는 사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다. 잠깐 졸았던 탓일까.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회벽처럼 굳어진 머릿속이 점차 풀어지면서 명료해지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생각의 파편들이 각각 제 조각을 찾아 깨끗하게 정돈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생각이 되돌아 왔다. 손에 들려진 술병은 벌써 바닥이 났다. 그는 일어서서 바위 뒤편에 세워둔 수레 안을 뒤져 남은 술병 하나를 찾았다. 수레 바닥엔 몰약이 든 작은 항아리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리고 건초들을 뒤집어 쓴 하얀 아마포 꾸러미도 보였다. 다시 건초다발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술을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차가운 밤기운을 달래주었다. 정신이 명료해진 후에 맨 먼저 배고픔이 찾아왔다. 보따리 속에서 꺼낸 말린 양고기를 찢어서 씹었다. 바짝 마른 양고기가 침과 뒤섞여 몇 번 씹지도 않아 부풀어 올라 입속에 가득 찼다.

그렇게 거푸 몇 번이고 말린 양고기를 뜯어 먹다가 다시 그이의 주검이 누워있는 동굴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건울음이 울컥 치밀어 올라서 막혔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배고픔과 그이의 죽음은 어떤 관계란 말인가. 한 사람은 죽어 잠들어 있고, 배고픈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이의 죽음 앞에서 말린 양고기를 뜯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더듬었던 부드러운 손길을 생각했다. 그렇다, 매듭이 길고 하얀 손은 분명히 그이의 것이었다.

헤아려보니 꼭 17년전의 일이었다.
갈릴리의 농부들은 헤로데의 과도한 세금에 불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작고 큰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가말라 출신의 유다를 대장으로 삼고 세금 저항 반란에 가담했다. 로마의 두 개 군단이 반란 진압을 위해 시리아에서 급하게 출동했다. 그들 반란군은 로마군에 맞서 처음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몇 번의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로마군들이 전열을 정비하여 노도처럼 밀어붙이자 맥없이 무너졌다.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한 반란군의 지도부는 뿔뿔이 흩어져 광야에 숨었다. 갈릴리 벌판은 불탔고 온 마을은 파괴되어 우물조차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대인 2천명이 처형당했다. 갈릴리의 젊은이 6천명이 노예가 되어 고향을 떠났다. 여러 세기 동안 땅을 일구고 살았던 농부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반란 진압이 끝난 후 농토도 농작물도 모두 잃어버린 농부들은 어디서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되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몇 년 후, 나자렛 마을에서 한 나절이면 걸어갈 거리에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근거지로 삼게 될 세포리스의 재건 공사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첫 번째 세금 저항 반란으로 파괴된 세포리스를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리스풍으로 다시 짓기로 했던 것이다. 세포리스는 동서축을 기준으로 바둑판 형의 거리가 이어지는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양식의 도시로 건설되었다. 상가와 사무실이 들어찬 대로는 도시의 상업적 종교적 중심지인 광장으로 연결되었다. 돌로 포장된 도로 아래에는 하수 처리 시설을 깔았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가 예루살렘에 지은 원형 극장과 유사한 호화로운 로마식 극장도 건설했다. 세포리스 건설에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인력, 물자, 식량등이 도시건설을 위해 집중되었다.

이 건설 사업은 갈릴리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갈릴리 밖의 수많은 사람들도 이 건설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세포리스 건설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젤로트당 지도부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를 건설현장에 보내 지난 반란 전쟁에서 깨져버린 조직을 다시 재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벌써 4개월 째 이곳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상황을 살펴보며 함께 일할 동지가 될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은근히 말을 붙여 보지만 지난 반란에서 워낙 화를 당한 기억이 생생한 터라서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군의 과도한 진압에 의해 농사지을 만한 땅은 모두 초토화되어 당장 호구지책으로 공사장에 모여든 사람들이라서 하루 일하여 하루 먹는 것에 급급한 처지였다.

이곳의 여러 정세를 파악하기위해 어제 밤엔 예루살렘의 지도부가 몰래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근처 계곡에서 동료들과 함께 모여서 밤을 꼬박 새워 토론을 했다. 지도부는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돈을 원했다. 그러나 현장에선 하루하루가 배고픈 사람들뿐이었다. 지도부는 대규모 도시 건설로 세포리스에 집중되는 엄청난 물자들을 보면서 이곳 사람들의 사정이 부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지도부의 편견은 교정되지 않았다. 서로 큰소리를 내며 댓거리를 심하게 할 정도였다. 밤새워 싸우듯이 토론하면서 그는 술을 많이 마셨다. 또 지도부는 이곳에서 농토를 잃고 도시 건설에 투입되어 노동자로 전락한 농부들의 불만을 하루빨리 조직해야 한다며 그 대안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농부들의 불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난 반란 전쟁에서 젊은 사람들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늙은이들만 남아서 어린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이곳의 처참함이 우선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늙은이들은 일손이 짧아서 젊은 사람들이 받는 임금의 삼분의 일 밖에 받지 못하고 그나마 이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그에게 매사를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한다며 빈축을 주었다.

<계속>

홍성담
/ 안토니오, 화가

 

 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광주 자유 미술인회' 조직에 참여했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1983년에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미술대중화운동에 힘써왔다. 
  1984년에 광주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 ‘새벽’을 제작했고,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한국작가, 1999년 개인전 ‘脫獄’을 서울 평창동 가나화랑에서 그리고 2004년 개인전 ‘假花’를 학고재화랑에서 가졌다. 
최근에는 일본과 동아시아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연작 ‘야스쿠니의 미망’으로 일본, 한국, 독일등에서 전시했으며, 2010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 초대전 ‘흰빛 검은물’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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