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이대훈]

추방되어야 할 동물의 왕국

올해 3월 20일 제주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간담회가 있었다.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해군기지가 들어서야 제주도가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아프리카 밀림에 가면 자연이 있다. 그게 관광 명소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는 그냥 무식한 검…흑인들만 뛰어 다니는 그런 곳일 뿐”이고, “이탈리아 카프리섬에는 자연만 있지 않고 많은 건축물이 있다. 그런 집과 자연이 어울려 있을 때 관광명소가 되는 것"이며 "해군기지는 창조적 건설물로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며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가장 아름다운 항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프리카는 ‘흑인’들이 사는 ‘밀림’으로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흑인’들은 ‘무식한’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무식한’ 존재가 과연 사람들로 묘사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이유는 ‘흑인’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곳일 뿐’이라는 설명 때문이다. ‘뛰어다니는 그런 곳일 뿐’이라는 표현은 앞의 ‘밀림’이라는 단어로부터 연상되는 육체적인 것, 즉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다. 이에 반해 관광명소로 칭해진 카프리섬에 대한 묘사에서는 ‘많은 건축물들’ 있는 그 공간은 보통 ‘뛰어다니는 그런 곳’과는 다른 곳이라는 암시가 담겨있다.

더구나 그 앞에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니 미처 완전히 멈추지 못한 ‘검둥이’이라는 지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로써 사람이 존재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이 조금 더 드러난다 (그런 ‘명소’들이 있는 나라에서는 ‘검둥이’이라는 말을 쓰면 공직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아프리카를 이렇게 동물적 공간으로 묘사하는 배경에는 ‘우월한 인간 대 열등한 동물’ 이라는 철저한 우열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검은 피부, 동물, 뛰어다니는 곳이며 명소가 아닌 곳 (이름 없는 곳)은 한 궤에 엮인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 있는 아름답고 이름 있는 곳은 유럽의 한 나라이다. 후진과 선진의 대칭이 이렇게 표현된다. 아프리카를 유럽과 대비되는 열등한 곳으로 보는 것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우월감을 내재화한 마음가짐의 특징이다.

이러한 인종적 구도는 반대자를 열등한 비인간으로 볼 때뿐만 아니라, 색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추켜세우고자 노력할 때도 작동한다. 올해 1월 31일 <세계일보>는 아프리카 출신 빅리그 축구선수들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떠오르는 아프리카] 유연성 뛰어난 ‘검은 표범’들 세계축구 호령”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올리면서 ‘검은 대륙’을 칭찬했다. 김태영 장관의 인종주의적 발언에 담긴 ‘검은 색’이 갖고 있는 동물적 암시가 확인되는 또 다른 경우이다. 또 한국 사회에서 검은 색이 어떻게 특정 사람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기호로 사용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경우이기도 하다. 다른 피부색을 가진 다른 훌륭한 축구선수들이 ‘하얀 표범’이라던가 ‘노란 말’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때 이를 알 수 있다.

아프리카에 관한 일반 기사에서 스포츠 영역 외에서 ‘떠오르는 아프리카’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즉 아프리카는 스포츠와 구호를 제외하고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곳으로 취급되는데, 그 어려운 상황에서 비상하게 아프리카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표범’들인 것이다. 물론 모든 표범이 검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검은 표범’에서 검은 색은 표범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검다고 간주되는 것, 즉 ‘흑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을 ‘표범’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의 운동능력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묘사된 운동능력은 인간적이지 않고 동물적이다. 그리고 이 훌륭한 운동선수들은 축구계를 이끌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호령’한다. 이 음감은 말소리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에서 들었던 맹수의 ‘포효’에 더 가깝게 들린다. 역시 동물적 인상이 동원된 것이다.

2009년 6월 장광근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자리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을 두고 "아프리카 후진국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의 반군 지도자 선동발언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고 말했다. 세계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졌다는 사실과 반군과 독립군의 차이도 별로 크지 않다는 점들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열등하다고 생각된 정치인은 아프리카적이며 그의 연설은 연설이 아니라 ‘선동’인데 이는 위 스포츠 기사에서 표현된 ‘호령’과 같은 맥락이다. 상식적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즉 반대자들을 열등하게 취급하고자 할 때 이렇게 아프리카와 검은 피부, 후진성, 비인간화가 동원되며, 피부색이던 정치색이던 ‘색’이 다른 사람을 동물의 왕국으로 추방하는 방식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운동선수가 탁월한 신체 능력을 보일 때 “흑인의 탄력과 유연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며, 백색 피부를 유지하지 못한 한국의 유명인이 피부색에 관한 논란에 처할 경우, "당사자가 자신은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여과없이 보도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같은 해 3월 이명박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교민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것은 세계 최고인데, 어떤 것은 아프리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통령의 발언에서 아프리카는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배태한 평등한 교류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최하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금지의 기준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아프리카는 단 하나의 빛깔, 즉 검은 색으로만 (‘검은 대륙’) 존재하게 되며 이런 인종주의적 단순화의 논리 아래 동물의 왕국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아프리카는 세계의 표준으로부터 아주 먼 지점에 멈추어서기를 강요받는다.

난데없이 나타나는 푸른 눈의 천사

우리는 동물의 소리를 동원하는 인종주의와 연관된 또 다른 어떤 가능성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영어를 공용어 수준으로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이 오렌지를 ‘아륀지’로 발음하지 못하는 (혀가 짧은) 한국인들을 비웃었을 때, 이 사람들이 상상했던 그 ‘아륀지’라는 멋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필히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언론 보도에서 이러한 상상이 작동하는 몇 가지 예를 찾아보았다.

스포츠 언론에서 야구장에 ‘백인’ 여성이 등장하면 “푸른 눈의 수호천사가 떴다”로 묘사된다. 야구장에 왜 천사가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일체 없이 ‘백인’으로 인식되는 인물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외모는 “검은머리에 푸른 눈이 매력적인” 사람으로 표현되며, 그가 한국 선수들을 많이 아는 것이 대견하며 몇몇 선수들을 “멋있다”고 평가한 것이 기사거리가 된다. 이러한 기사의 이면에는 다른 눈동자 색을 가진 외국인 야구팬, ‘흑인’ 야구팬이나 ‘아시아인’ 야구팬에 관한 기사가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푸른 눈’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푸른 눈의 며느리’ ‘푸른 눈, 하얀 가운의 천사’). 다음의 기사 제목들을 보면 그 상징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유아 위해 헌신한 ‘푸른 눈의 천사’ 000 선교사”
“푸른 눈 의사들의 천사같은 ‘인술’”
“소록도에 찾아온 푸른 눈의 천사”
“푸른 눈의 천사들과 초록세상을 만들다”
“비운의 체조 스타 지키는 푸른 눈의 천사”
“천사들의 합창: 빈 소년합창단 공연”


물론 여기서 이 천사들은 모두 이른바 ‘백인’계 사람들이며 여성 또는 ‘여성적’이거나 ‘여성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한 ‘백인’ 여성 배우를 소개하는 일간 스포츠 매체의 기사는 “긴 금발을 따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 같이 청순한 모습”이라고 묘사한다. 그에 대한 인터뷰 질문에는 “당신은 순진하고 천사 같다는 말을 듣는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의 이면에는 ‘검은 눈의 천사’, ‘노란 눈의 천사’, ‘검은 천사’, ‘파란 눈, 금발의 악마’에 관한 기사나 제목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푸른 눈의 천사’는 이 외에도 소설과 만화 등 문학작품의 제목, 홈페이지와 개인 ID 등에서 자주 애용되는 ‘선한’ 이름이다. ‘백인’의 선함에 관한 상상과 같은 인종적 상상과 ‘천사’라는 기독교적 이미지가 이렇게 긴밀하게 중첩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국내 한 대학에서 한글에 대한 외국인 학생들의 관심을 소개하는 기사에 실린 것이다. 기자 또는 대학 측의 주문에 따라 배열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학생들의 배치에서 중앙과 주변을 나누는 자리 배치에 ‘인종’적 표식에 따른 구분이 적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 역시 ‘푸른 눈의 천사’ 구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광고에서도 ‘백인’의 표상은 애용되는데 특히 ‘원어민’ 영어 강사의 이미지에서 자주 등장한다. ‘아륀지’ 파동과 연관된 것인데 영어 교육에서 원어민은 자동적으로 우수한 교육자로 등치되며, 여기서 원어민은 압도적으로 ‘백인’과 등치된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하며 그 영어도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어 교육에서는 그 ‘원어민’ 중에서도 ‘푸른 눈의 천사’ 이미지와 가까운 ‘백인’들이 선별되어 광고에 이용된다. 역시 인종이라는 기호를 사용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보험회사의 하나인 000화재보험의 경우, 가족단위 보험 광고에서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면서 그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광고를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행복하고 소중한 가정은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초원에서 피크닉을 하며 서로 항상 웃는 모습인데 모두 ‘푸른 눈의 천사’와 가장 일치하는 피부색과 외모를 가진 배우가 사용되었다. 행복함을 판매하는 광고에 이 인종적 이미지와 다른 인종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에 비해 ‘흑인’이 등장하는 광고는 이미지가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국내 유수통신업체의 광고는 우선 ‘자상한 아빠’를 등장시켰다가 가족 통신비를 보고 분노하는 표정을 클로즈업 하는데, 이때 자상한 아빠가 변신되어 버리는 것은 포효하는 거구의 ‘흑인’이다. 그 변신 과정은 자상한 아빠의 얼굴 중에 코가 가장 먼저 넓적해지고 커지며 다음으로 턱이 팽창하며 그 다음 턱과 목 전체가 털로 덮여가는 단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변신은 거대한 근육질이 팽창하면서 옷이 찢어지고 맨몸을 드러내는 것으로 완성된다.

 

 

 

 


앞선 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 ‘흑인’은 괴성을 내는 것으로 그려진다. 앞으로 튀어나온 턱, 납작하고 큰 코 등 두개골의 형상이 인종주의자들이 상상하고 애용하던 ‘열등함’의 표식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열등함’에는 감정을 앞세우며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 광고에서 자상한 아빠가 분노하는 ‘백인’으로 그려졌다면 어떤 반응들을 예측해 볼 수 있었을까. 여기서의 흑백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인종적 표식들이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말한 ‘검... 흑인들만 뛰어다니는’ 아프리카와 ‘푸른 눈의 천사’라는, 인종적으로 서열화된 세계관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거의 자명해 보인다.

*2010년 10월 22일, 한국사회 성․인종차별문제 토론회 <뿌리내린 성․인종차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이대훈/ 프란치스코, 성공회대 평화학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