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uario della Verna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여름 평소처럼 침묵과 기도 시간을 갖고자 베르나 산에 은거하였다. 성인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사랑과 고통의 신비에 자신의 온 존재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천사의 형상으로 발현하시어 당신 수난의 오상을 성인에게 선사하였다. 마음과 삶으로 이미 그리스도를 따랐던 성 프란치스코는 이 사건으로 외적으로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었다. 그 옛날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았던 자리는 경당으로 변모했고 성인이 서있을 법한 바로 그 지점은 유리로 덮여있어 순례객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성인의 영발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베르나의 프란치스코회 공동체는 기도의 집이며 17-30세 청년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침묵과 기도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있다.

수도원 건물



2007년 6월 23일, 베드로와 나는 프란치스코와 아가다 가족과 함께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오상을 받은 베르나 성지로 성지순례를 갔다. 벌써 여름철 무더위가 시작되어 에어콘이 작동하지 않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성지순례는 그야말로 순례다운 여정이 될 것 같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도보 행진과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로마를 출발하여 오르테 (Orte) → 오르비에토 (Orivieto) → 페루지아 (Perugia) → 아레초 (Arezzo)를 지나 비비에나 (Bibbiena)를 가기 전인 라씨나 (Rassina)에서 키우지 델라 베르나 (Chiusi della Verna)로 직통하는 길을 따라가니 베르나 산길이 시작되었다.


그 옛날 아시시에서 베르나 산까지 맨발로 걸어갔을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하니 이까짓 더위쯤이야 견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나마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편안하게 자동차로 이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낮 햇볕이 송곳으로 목덜미를 잔인하게 내리꽂고 있어서 부채로 목덜미를 감싸면서 졸음을 쫒았다. 우리가 다녀온 Verna 성지는 로마에서 왕복 500km 거리였다.


베르나 산을 자동차로 오르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시작하였다. 성지 정상에 오르는 길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탄 대형버스 한 대를 앞질러 갔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자 최선을 다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그 고결한 마음을 닮았으면 좋겠다. 산 정상에 위치한 성지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 늦가을 날씨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덥다했던 마음은 어디가고 이제는 춥다는 말이 입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나무그늘에서 점심을 먹자던 계획을 접고 성지 입구 주차장에 세워 놓은 두 차 사이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승우 가족은 점심으로 김밥과 유부초밥을, 우리는 파스타와 야채를 싸와 서로 나눠먹었다.


성지로 들어서는 입구는 녹음으로 우거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긴팔 옷을 입었는데도 덥지가 않았다. 성지 방문은 글라라 성녀의 방 (Sala di Chiara) → 성지 박물관 (Museo dell Santuario) → 성 프란치스코 성당 (Chiesa di S. Francesco) → 성 프란치스코 복도 (Corridoio del S. Francesco) → 오상 경당 (Cappella delle Stigmate) 순으로 진행되었다.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오상 경당으로 가는 긴 복도 한쪽 벽에는 성인이 일생 동안 겪은 중요한 사건이 프레스코화로 서술되었다.



십자가가 세워진 작은 광장에는 남미 대륙에서 온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들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도하거나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베드로는 오늘은 운이 좋다며 연신 카메라 스위치를 눌렀다. 회원들이 참여한 십자가 행렬, 십자가 광장의 개인 묵상, 프란치스코 성당의 마침 기도를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있어서 너무도 기뻤다. 승우가 베드로를 위해 십자가 광장에 앉아 있는 수사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기꺼이 ‘OK!’ 하며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두 수사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서 정겹게 악수를 청했다. 

 


 


 

베드로가 어느 틈엔가 서있던 수사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는지 나에게 카메라를 넘겨주며 ‘엘리, 부탁해요!’ 하며 수사 두 명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찍사가 오랜만에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찰카닥’하고 셔터는 자신 있게 눌렀기는 했는데 사진 품질에 대해서는 책임을 자주 못 지는 것이 내 약점이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휘발류가 바닥을 쳐 주유하려고 주유소에 들렀는데 토요일 오후라 서비스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동주유를 할 수 있는 장치에다 20유로를 넣고 기계 손잡이를 차 기름통에 꽂았는데 휘발유가 나오지 않았다. 돈을 넣고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데 미리 휘발유가 나오는 손잡이를 만져서 휘발유는 나오지 않고 돈만 미리 지불되었다는 영수증이 나왔다. 승우와 우리가 서로 박자가 엇갈려서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이 영수증을 갖고 10일 이내에 이곳에 와서 환불하거나 주유해야만 유효한 것이다. 성지순례 마무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던 마침표가 물음표로 바꿔버렸다.

며칠 후 나는 그 주유소에 전화를 해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담당 직원은 일주일 이내에 이곳을 지나는 길에 주유를 하라고 한다. 우리는 로마에 머물기 때문에 그곳에 당장 갈 일이 없다고 하자 그럼 영수증과 집주소를 편지로 보내면 20유로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과연 그 직원말대로 20유로는 되받을 수 있을 것인가? 영수증을 가지고 있을 들 직접 가지 않으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영수증과 집주소를 편지로 보냈다. 긴가민가하며 거의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 주유소로부터 20유로가 든 편지 한 통이 도착한 것이 아닌가. 가게에 가서 물건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보는 앞에서 확인해야지 바로 뒤돌아서면 끝까지 제대로 줬다고 우기는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이번에도 의심이 가득한 채로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는데 내 생각이 빗나간 것은 참 다행이었다.

/최금자 김용길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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