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가, 이철수

 

“제 그림이 착한 이웃처럼 사람들 곁에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이철수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참 아늑했다. 예전에 산골에 살아 본 경험은 있었으나 이런 평지 마을을 보니 마음도 소곳하니 편안해진다.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문전옥답이라고, 논물을 대어놓은 집앞에 서있던 이철수 선생이 손을 흔들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집에 들어서자 먼저 수돗가에서 손을 씻으며 씨익 웃어보였다. 아내인 이여경 선생이 마루에서 내려와 그래, 맞아, 하신다.

뒷산 되찾기 운동, 마을공동체 살리는 일

먼저 밥을 먹으러 갔다. 냉면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두 부부는 내내 평동리 안골 뒷산 110만여평의 ‘마을 산 찾기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2천여 평이나 되는 농사도 뒷전으로 미뤄 둔 지 벌써 3년째 접어든다.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철수 선생은 “지금 일제 강점기에 국가 소유로 잘못 편입된 마을 주민들 소유의 산을, 그 치욕적인 역사적 과오를, 도로 제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재판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연과 마을을 지키려는 일입니다. 자연환경과 마을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려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제천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철수 선생이 이 일에 나서게 된 것은 마을 뒷산에 2만여평에 달하는 대규모 산악형 리조트를 건립하려는 M캐슬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제천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인데, 리조트 유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마을 뒷산 소유권이 본래 마을 소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110만평이 넘는 평동리 산 67-1번지와 산71번지는 1918년 일제의 산지조사에서 그 소유권자가 '평동리'로 사정됐다. 1931년에 제천군 백운면으로 소유권 이동이 이뤄졌으며, 1961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소유권이 백운면에서 제천군으로 이전됐고, 지금은 제천시의 시유림이 됐다. 이 모든 소유권 이전이 증여나 매매 과정 없이 마을 공동체의 소유권을 부당하게 이전한 것이라며 제천시를 상대로 산을 되찾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평화에 마음이 쏠려서, 그런데 어떻게

이철수 선생은 평동2리에 21년째 거주하며 농사를 짓고 있으며, 판화작업도 여기서 한다. 선생은 1980년대 내내 판화를 통해 사회변혁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1988년 무렵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으로 판화영역을 확대가면서, 평범한 삶과 일상사를 관조하는 자기수행의 과정으로 판화를 새기게 된다. 요즘은 주로 생명평화운동에 관심이 많은 데 판화를 통해 시민단체를 지원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좀 더 실천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마을 뒷산 찾기도 그런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운동은 제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작업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아들네미 이야기로 이어졌다. 큰 아들한테 군대에 가기 전에 시민단체에서 봉사 좀 하라고 했더니. ‘아름다운 재단’을 선택해 왔단다. 이여경 선생은 엄마로서 기왕이면 비교적 고상한 그런 데 말고 인권연대처럼 좀 격렬한 곳으로 가지, 하며 아쉬워 하였단다. 그런데 아들 이야기인즉, 여러 시민단체에 전화해 보았는데, 일단 와 봐라, 하면서 제대로 답변해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재단에서만 상세하게 단체 성격과 할 일 등을 일러주는 바람에 거기에 마음이 끌린 모양이다. 이여경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운동단체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너무 깊어서 종종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관계 맺는 방식과 다른 이들에 대한 섬세한 배려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이철수 선생에게는 판화 때문에 꽤 많은 시민사회단체 사람들과 기업 사람들도 찾아오곤 하는데, 시민단체에서는 기금마련 전시회를 하려고 판화를 얻어 가면서도 언제 어디서 하는지 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본인이 물어봐서 참석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확인해주는 절차가 없을 때마다, 그 사람들이 활동하느라 바쁠 테지, 하고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답답해진다는 것이다. 삼성에 대해서 우리가 욕을 많이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함께 식당엘 가더라도 꼭 한 사람은 뒤에 남아서 신발을 정리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손님을 배려하는 태도가 놀랍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보다 못하면 어떻게 인간을 위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권정생 선생을 보내며

식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누었던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도 마음에 남아 있다. 권선생님 유언장을 보면 참 애잔한 느낌이 든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그분은 돌아가시면서 제 살던 조탑동 집을 부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지인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의논을 하였는데 '권정생 어린이재단‘도 설립하고, 갑론을박 끝에 생가도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현주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권정생 선생님 곁에 살며 오가던 이철수 선생은 여전히 생가 보존에 유감을 드러내었다. 고인이 바라던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마음이 동하는 사람은 빈터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그분을 추모할 수 있는 것 아닌지, 하는 것이다. 그분은 소막을 고쳐 집으로 삼으셨고, 이제 저승에 가서 그 집도 온기를 데우는 사람이 없으니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분의 삶처럼 그분의 집도 따라가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툭 털고 가야지, 일하며 묵상하며

그 많은 원고료가 들어와도 제 것이 아닌 양 사셨던 권정생 선생님이다. 그 많은 돈을 제 몸 위해 쓰지 않고 죄다 어린이들에게 내어주고 가신 분이다. 만사 툭 털고 가시게 하자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않은 모양이다. 곱게 사셨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무심하게 무념하게 무상하게 이승을 뜨신 분들에게도 ‘--재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긴 영성가인 헨리나웬을 기리는 재단도 있으니, 재단이 제단 노릇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분들이 기억으로 남아 우리 삶을 재촉해주길 바란다. 재단 운영 때문에 돌아가시고도 마음 쓰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철수 선생은 자신의 판화를 요즘 사람들이 ‘감성적’이라고 말하는데 반발한다. 사람들은 이성이냐 감성이냐를 두고 논하는데, 어느새 오성(悟性)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성을 키우려면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말하는데, 글쎄, 이철수 선생은 자연과 몸을 통해 길어올린 깨달음이 아니라면 소용없다고 말한다. 대개의 시집조차 ‘생산공장’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20여년 동안 이곳 평리에서 농사지으며, 사람들과 마을에서 어울려 살며 길어올린 한 생각을 나무에 새겨넣는 일이야말로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도시고 농촌이고 한 생명을 키우며 생애를 묵상하지 않는다면, 텃밭에라도 나가 호미질하며 그 풋풋한 목숨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생이 주는 깊이를 맛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이다. 그 마을에 사는 착한 이웃처럼 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철수 선생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점점 뿌리내리며 초록이 우거질 숲을 보는 것 같아서 상쾌했다.

 

 

 

 

 

 

 

 

 

 

 

 

 

 

 

 

 

 

 

 

/한상봉 200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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