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호인수]

누가 그랬던가, 담배 끊은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고. 독하다는 게 이유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운다. 20년이 넘도록 물고 다니던 것을 끊은 지 꼭 17년 됐다. 이제는 누구라도 아직 장담할 수 없다고는 못할 게다. 나는 과연 독한 사람인가? 솔직히 말하는데 “아니다!” 인내심도 없고, 한번 한다면 하는 결단성도 부족하고, 매사에 물러터지기만 하다.

그 해, 나는 안식년을 얻어 독일 누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담배를 적어도 하루에 한 갑 이상씩 피우던 때였다. 뒤란으로 창이 나있는 널찍한 방이 내 차지였는데 누나네 식구들은 어른, 애 할 것 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어서 내놓고 피우기가 좀 뭣했다. 참느라고 참았지만 식후 금연은 3초 내 즉사라, 방문을 꼭 닫은 채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피울 수밖에...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과 맛을 무엇에 비길까? 담배 연기는 넓은 정원으로 잘도 빠져나갔고 방안은 냄새 하나 없이 쾌적했다. 완벽한 처리였다.

문제는 조카 녀석들이었다. 이놈들이 내 방 앞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코를 벌름거리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저희끼리 수군덕거리는 것이다. 담배 냄새가 난다 이거지. 복도로 난 방문은 꼭꼭 닫아서 바람도 안 통하는데 어찌 그리로 연기가 새 나갔을꼬? 이놈들 코는 모두 개코인가? 한편 괘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슬슬 ‘쫀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것들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담배를 물고 살아야 하나? 에이, 더럽고 치사해서 차라리 안 피우고 말지.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다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담배 생각이 삭 없어진 것이다. 밥을 먹고 나도 생각이 안 났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담배를 끊자고 9일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아프게 입술을 깨문 일도 없다. 있다면 그저 예쁜 조카들의 찡그린 얼굴 표정에 대한 기억뿐이다. 소위 금단현상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나는 오늘까지 왔다.

담배라면 나보다 두세 배는 더 피우던 선배 조성교 신부의 이야기. 지난 2008년 봄이다. 우리 일행 넷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2000리 순례를 위해 파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프랑스 국경으로 가던 중이었다. 밤 시간이 무료하던 차에 일행의 리더인 외과의사 홍성훈 선생이 난데없는 내기를 걸었다. “조 신부님이 담배를 끊으면 내가 우리신학연구소에 천만 원을 기부하겠습니다. 대신 실패하면 없던 일로 합니다.” 아니, 담배 끊는데 천만 원을 걸어?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좁은 통로로 나가서 선배에게 넙죽 큰절을 했다. “형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양반 왈, “야야, 너 나한테 잘 보여. 여차하면 다시 피운다.” 그 후로 그가 담배 피우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연구소 통장에는 에누리 없는 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고.

부자의 객기가 아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옳은 일이라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여는 홍 선생은 이미 연구소에 그 돈을 기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터였고, 조 선배는 집 떠날 때부터 머나먼 순례에 골칫거리인 무거운 배낭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부피가 큰 담배는 갖고 가지 말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뜻밖의 선물은 두 분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지난 추석 다음 날, 여러 동무들과 함께 북한산 둘레길에서 내려와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서 홍 선생은 또 한 번 후배 의사인 ㄱ씨의 옆구리를 찔렀다. “네가 올해 안에 담배를 끊고 두 달만 안 피우면 네가 지정하는 곳에 내가 천만 원을 기부하겠다. 대신 그게 안 지켜질 경우에는 네가 이천만 원을 내가 지정하는 곳에 기부하는 거다. 신부님이 공증인이다. 어떠냐?” ㄱ씨는 계산 좀 해보자며 즉답을 피했지만 눈치를 보니 둘 다 또 어디엔가 기부하고 싶은 곳이 있는 게다. ㄱ씨가 드디어 담배를 끊을 것인가, 아니면 두 배로 벌금을 낼 것인가? 자못 궁금, 흥미진진하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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