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도가니> (2009, 창비)를 통해 본 인권

공지영의 <도가니>’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강인호는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은 열악하다 못해 참혹한 교육환경에 학생들에 대한 폭력과 성폭행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었다. 강인호는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상에 고발하지만, 학교와 학연과 지연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지역 언론, 경찰, 검찰, 법원의 반격에 좌절을 겪게 되고, 이 참혹한 현실에 책임이 있는 범죄자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알 만한 사람‘만’ 아는 문제: 장애인 시설

사실 이 소설이 고발하고 있는 장애인시설문제의 ‘현실’ 자체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알 만한 사람만 알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문제일 뿐이다. 저자 공지영은 자신이 알게 된 현실의 “3분의 1”을 책에 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인시설문제를 밝혀내기 위해 인권운동가들이 전국을 누비고 있다. 소설은 과거의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현실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엄청난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둔갑시키는 ‘은폐의 관계망’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문은 아직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악인’들의 ‘악행’으로 인한 우발적인 문제 발생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가 곳곳에 만연되어 있고, 고발 등의 조치가 취해져도 유야무야된다는 사실에는 쉽게 납득하질 못한다. 실제로 <도가니>의 무대가 되었던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법원에서 실형을 받았으나, 나중에 학교로 복직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성폭행한 '교육자'들이 말이다. 이 학교에는 그 후에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지난 8월 광주 광산구청은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 조사위를 꾸렸다고 한다.

‘사실’의 전달이야 장애인인권단체들이 내는 보고서가 더 정확하겠지만, ‘소설’의 형식으로 읽는 그 ‘사실’은 더 극적이고 생생하다. 소설의 실감나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가 특별히 온 힘을 다해 묘사하고 있는 ‘은폐의 관계망’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행정기관, 이들을 감시해야 할 지역 언론, 경찰, 검찰, 그리고 법원, 그리고 이들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학연, 지연, 혈연의 치밀한 네트워크는 이 엄청난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우리가 한국사회의 어떤 심각한 문제를 접할 때 흔히 보던 장면이다. 생각해보면, 최근 한국사회의 가장 은밀한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어 화제가 되었던 저작들, “불멸의 신성가족”, “삼성을 생각한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의 공통점은 바로 그러한 은폐의 관계망을 고발했다는 데에 있지 않았던가?

중층적, 복합적 감시가 필요하다!

문제가 복잡한 만큼 문제해결의 방법도 그만큼 중층적이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원래 나쁜 사람들’만 인권 침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범적인 경찰관이나 도덕군자 같은 교사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의해 언제나 인권침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감시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우선 자율적이고 건강한 자치 공동체의 존재는 문제발생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지역의 공식적, 비공식적 공동체, 다양한 풀뿌리 NGO, 종교기관들이 필요하고, 지역자치언론은 여기에 감시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한다. 민주적인 자치가 구현되는 건강한 지방자치단체가 있어야 하고, 그 내부에는 이를 감시하기 위한 각종 고충처리기구와 감찰기관이 설치되어야 한다.

외부에는 경찰, 검찰, 법원 등의 사법기관이 있고, 여기에도 역시 치밀하게 설계된 내부 감시기구가 설치되어야 한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감사원이나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외부의 감시기구도 필요하다. 이러한 감시의 네트워크들은 때로는 중복적이고 때로는 순차적으로, 때로는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작동한다. 이것은 인권침해를 가능하게 하는 은폐의 관계망만큼 충분히 중층적이고 복합적어야 하고, 긴밀하게 서로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

이들 감시기구들의 역할은 때로는 중복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얼치기 ‘행정전문가’들의 눈에는 ‘비효율’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감시의 ‘대상’인 은폐의 관계망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그들이 여러 관계망을 동시에 때로는 순차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그것을 감시하는 네트워크도 그만큼 중층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이쯤 해서 그나마 제 역할을 다해오던 국가인권위원회의 기능이 다른 기관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조직을 21%나 축소했던 비극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소설에서 인호는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지는 못한다. 평범한 소시민에서 화끈한 투사로의 변신을 기대했던 ‘과격한’ 독자들도 있지만, 만약 인호가 투사가 되었다면, 복잡한 문제는 오히려 단순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변신’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다”라고 감동했을지 모르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소시민들에게 그런 용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 편에는 정의감을 간직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방황하고 좌절하는 인호의 모습이 사실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전제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폐의 관계망’ 못지않게 치밀하게 설계된 ‘감시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 작은 양심과 그 작은 용기가 짓밟히지 않도록......

홍성수/ 교수, 숙명여대 법과대학

[기사제공-인권연대 http://h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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