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돈 에버츠 <예수의 더러운 발>, 규장, 2007

인생의 깊이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혹시 예수와 그리스도교가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해서 탐색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가 '가슴 뛰게 하는 진리'인지 '바보같은 소리'인지 고민하면서 쓰여진 책 한 권이 있다. "당신이 직접 예수를 보라'고 권하는 이 책은 돈 에버츠가 쓴 146쪽에 지나지 않은 작은 책 <예수의 더러운 발>이다.

에버츠는 먼저 "예수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야 말로 십인십색(十人十色)이 아닌가? 담배 피우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 착실한 사람들에게 복을 준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르쳐준 온화한 예수가 있는가 하면, 해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관총을 둘러멘 예수'도 있고, 심지어 '우파 예수' '좌파 예수' '동성애자 예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버츠는 "지난 2천년 동안 예수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인 진부한 이야기들과 판에 박힌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예수를 볼 방법은 없는가?" 묻고 답할 용기를 냈다.

에버츠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시선으로 예수를 바라본다. "그리스도교는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어부들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30세가 된 목수 예수를 만났고, 예수는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 이 말뿐이었다. 형제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말 그대로 삶을 예수께 드렸다. 손에 익은 그물을 내려놓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예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다. 예수는 첨탑건물을 세우지 않으셨고, 신학논문을 쓰지 않으셨고, 헌금을 거두지 않았으며, 성직자 옷을 입지 않으셨고, 법인을 만들어 탈세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제 손으로 생계를 돕던 어부와 혁명을 이루겠다는 게릴라와 세리였다.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을 믿었고, 경청했고,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에게 질문을 했고, 순종했고, 배웠고, 결국 생명까지 바쳤다. 이게 그리스도교라는 것이다.

그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은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굳게 믿었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람'(Christ-one)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Christ-ians)이 되었다.

예수는 털많은 사촌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로 들어가 거처도 음식도 없이 지냈다. 불모의 광야에서 몇 주일을 보내며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이 상상을 초월하는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해도 마다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외로웠지만 굴하지 않았다. 예수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다시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가셨고, 세상을 영원히 변화시키셨다. 이제 전혀 다른 삶이 세상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를 알던 이웃과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열광했다. 병자들을 보고도 점잖은 채 지나치거나 회피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세상에서, 예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거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셨고, 문둥병자를 만져주셨고, 약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종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고 종교적 보상과 특권을 위해 권모술수를 획책하는 시대에, 예수는 힘 있는 자들의 불의를 정죄하고, 가난한 자들의 소박하고 진실한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 종교가 자신의 종교적 원칙을 희생하고 타협을 일삼는 암울한 시대에, 예수는 그들의 죄를 분명히 지적하셨다.

예수에게는 명쾌하고, 아름답고, 독특하고, 강력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늙은 랍비들도 그의 교훈에 놀랐고, 어린아이들은 예수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고, 부끄러워하던 창녀들조차 예수의 발아래서 울었고,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고, 율법학자들도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 거친 노동자들 심지어 엄청난 부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 원했다.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더불어 흙먼지 날리는 길을 다니셨다. 그들과 함께 잔치에 갔고, 함께 식사했고,함께 일했다. 예수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으로 행하셨고, 추방당한 자들과 부대끼셨고, 죄인이나 범죄자들과 함께 잔치에 갔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족으로 맞아주셨다. 그러니 예수의 발이 더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가 가르친 것은 하느님 나라였다. 그분은 어려운 신학용어나 모호한 암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는 비유를 들어 설명했는데, 수정처럼 맑은 은유와 도발적인 단순한 이야기였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양을 돌보는 평범한 일을 소재로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에 날카로운 진리가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낚시 바늘이 물고기의 입을 뚫고 들어가듯이 예수의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으로 뚫고 들어가 거기 영원히 머물렀다. 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시같이 아프고, 어떤 사람들에겐 진통제 같았다. 그래서 말씀이 끝났을 때 그들은 아마 말없이 생각에 잠기거나 아니면 분노했을 것이다.

예수는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에게 인정받거나 권력자들에게 영합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잘 알겠지만 예수는 지도층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종교 지도자, 정치인, 현 상태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예수가 가르치고 치유하며 만들어낸 변화의 물결에 신경이 곤두섰다. 결국 용의주도한 그들의 계획으로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 다시 사셨다.

이제 예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우리 귀에 들릴만큼 가까이 오신 하느님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 속으로 파고드는 말씀이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 하느님이다. 고대 히브리 민족이 믿었던 야훼께서 이 땅에 내려와 숨쉬고 말하고 사랑하셨다. 먼지투성이 샌들을 신은 겸손한 목수, 예수. 그분은 자신의 신발에 달라붙은 먼지를 이미 오래 전에 생각해내고 창조하신 분이다. 예수는 자신을 속속들이 보이시기 위해, 모래 먼지 날리는 삶 속에서 발을 더럽히며 수고하기 위해, 세상을 영원히 바꾸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다.

최근 개신교에서는 옥한흠 목사의 선종으로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도로시 데이는 개신교인들에겐 '성경'이 위로가 되고, 가톨릭신자들에겐 '교회'가 위로를 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에 앞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예수'를 알고, 믿고, 따라야 한다. 예수의 운명을 제 운명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처럼 아픈 세상의 그늘로 옮겨와 위로를 주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성경도 교회도 도움이 되어야 할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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