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귀천 14주기 추모식 열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며 고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캠프’의 대부였던 사람, ‘무위당’ 장일순. 그의 귀천 14주기를 맞는다.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그의 묘소 입구에는 작은 팻말이 수줍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선생의 묘소에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그의 글씨를 본뜬 묘지석이 추모객들을 반긴다. 어디선가 그의 밝은 음성이 담긴 듯한 뻐꾹새가 짧게 운다. 묘지석 아래에는 선생의 작품하나를 새겨 넣어 그의 생각을 ‘지금여기’에 서있는 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하나의 풀이었으면 좋겠네
차라리 밟아도 좋고
짓밟아도 소리없어
그 속에 그 속에 어쩌면”


11시에 예정된 추모식이었지만 이미 누군가가 다녀간 듯 소박한 그의 묘 위에는 흰 백합 한 다발이 올려져있다. 추모객을 맞이하는 선생의 동생 내외분과 세 아들은 살아생전 그의 모습을 보는 듯 겸손한 그의 그림자가 입혀져 있다. 세상에 없는 그를 여전히 ‘스승’으로 부르는 이름 없는 작은 자들이 묘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연신 줄을 서고 있다. 멀리서 몸이 불편하신 리영희 선생이 오시고 그의 제자였던 김영주 선생과 이병철 선생도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병철 선생에게 ‘무위당’에 대한 회고를 묻자 “그 분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란 한 마디에 그의 마음을 압축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무위당’ 장일순을 세상에 들어내고 알린 사람이 김지하 시인이라면, 그의 가르침 알맹이를 체화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이현주 목사이고, 그의 삶을 사회화한 사람은 ‘한살림’의 박재일회장이라고....

그러나 ‘좁쌀 한 알’이었던 장일순을 따르는 사람들은 오늘도 ‘좁쌀 한 알’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묘소에는 아기를 업은 젊은 주부들을 비롯한 이들의 발길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있는 것은 보기드믄 일이다.

한편 ‘장일순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추모식 전 날이었던 24일 원주 상지대에서 ‘무위당 좁쌀 만인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의 생명평화사상을 잊지 않고 전하기 위해 전국의 ‘만인계’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기념관 추진사업을 확정했다. 무위당 홈페이지는 www.jangilsoon.com 이다.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의 중간쯤에.

노겸(勞謙). 겸손을 넘어선 노겸. 제자 김지하는 선생을 노겸이라 불렀다. 그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을 ‘한살림’이라 했다. 세상의 조화로움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활짝 문 열고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고 그의 몸짓에 담았다.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에게 밑바닥 사람은 하늘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맡은 일을 해나가며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끝내 내가 한 일이 아니라며 ‘좁쌀 한 알’ 되어 땅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땅은 다시 하늘이었다.

‘느닷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을 만나고, 사도 요한이 골고타산을 만났듯이. 그러나 그런 일은 소명이다. 언제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가능하다면 천천히 다가오면 좋겠지만 재미없게도 그런 방법이 아니고 일순간 코앞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그런 일의 특징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라”는 말은 교훈이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여기’에서 말이다.

지금보다 더 매섭게 ‘성장개발’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온 나라가 외눈박이 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쟁이 결코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다며 ‘共生是道’(함께 사는 것이 인간도리)라 말했다. 그는 청소년과 농민을 위한 교육 및 탄광노동자와 영세민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을 전개하며, 도농 모두가 사는 ‘한살림’을 시작했다. 그것은 온 천지 더불어 사는 생명평화운동이었다.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모시자(侍)’며 펼쳤던 교육과 사업과 운동은 그 자체의 중요함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었으며, ‘조화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난초를 치고, 먹으로 글을 썼다. 누군가가 어느 것이 잘된 글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잘 쓴 글은 말이야, 노점상이 비뚤한 글씨지만 <붕어빵 팝니다>, <군고구마 있습니다>라고 쓴 글이 살아있는 글이야, 정성껏 쓴 글이 잘 쓴 글이란 말이지.”라며 웃었다. 그가 벗들에게 남긴 한 마디는 “기어라, 목에 힘주지 말고 밑으로 기어라. 안되면 기는 흉내라도 내봐.”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5월 22일은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14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의 중간쯤에 있었던 무위당 장일순 요한이다.

*이 글은 『가톨릭 마산』주보 5월 11일자에 실린 김유철의 글이다


/김유철 20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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