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농부시인의 행복론> 저자 서정홍씨
-농부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 꿈꿔

9월이 되었지만 여느해와 달리 폭염은 지칠 줄 모르고 대지를 흔들어댄다. 그러나 농부들은 수확의 계절을 향해 온 몸에 땀을 흘리며 생명을 돌보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태양볕 아래, 그저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 것만 같은 산골마을에선 생명이 일어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 자락, 농부 시인 서정홍씨의 삶터가 있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아담한 정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자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와 연신 부채질을 하며 얼굴에 웃음을 함박 머금은 할머니들이 평화스럽게 앉아있다. 그곳에서 조금 더 마을길을 올라가니 서정홍(53세, 안젤로), 그가 반갑게 먼 길을 달려온 손을 맞이해 준다.

▲ 서정홍 씨는 농촌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며 삶을 노래하는 농부들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꿈꾼다.(사진/상인숙 기자)

"농촌에는 사람이 귀합니다. 50대 중반에 들어서는 제가 이곳 청년회장인걸요. 회원은 아직 한명도 없어요. (웃음) 젊은이들이 귀농을 해서 땅을 일구고 생명을 살렸으면 좋겠어요. 우리 마을에, 농촌에 아이들의 웃음이 넘치고 논과 밭을 가꾸는 젊은 일군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옛날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서로 품앗이를 해가며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 갔으면 좋겠어요."

농촌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고 강조하는 서정홍씨는 집집마다 사정을 알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묵묵히 땅의 소리를 들으며 삶을 노래하는 농부들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꿈꾼다.

그의 얼굴에서 고추가 익어간다. 그의 미소에서 콩이 알콩달콩 열린다. 그의 손길에서 땅이 숨을 쉰다. 농부 서정홍은 행복하다. 그래서 그가 뱉어낸 말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서정홍 산문집 <농부시인의 행복론>이 그것.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이 책은 '생태귀농을 꿈꾸는 벗들에게 들려주는 생명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의 글은 '스스로 불편하고 소박한 삶을 가꾸는 법이나 자연과 어울려 자연처럼 살아야 하는' 법들로 가득차 있다. 그가 삶의 보금자리를 꾸민 황매산 기슭 낮은 언덕엔 올해도 찔레꽃들이 소담스레 피었단다. 그것을 자기 마음밭에 자리잡은 벗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서정홍씨. 그는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이제야 사람사는 기쁨, 함께 어울려 일하면서 땀흘리는 기쁨, 서로 나누고 섬기는 가운데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편리함만 추구하는 도시의 삶 경계해야

그의 숨결에 바람이 스미는듯 하다. 그의 얼굴에 흙과 물, 그리고 숲이 일렁이는듯 하다. 농부 서정홍씨는 도시 공간을 주된 축으로 흘러가는 삶의 시스템을 우려한다. 그는 또 도시에서 살지 않아야 되는 이유가 1천가지가 넘는다고 말한다. 도시는 닫혀 있고, 갇혀있어 영혼이 파괴된다고 말하는 서정홍씨. 사람과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이웃을 모르고 사는게 더 편한 도시의 삶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음을 닫고 지내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대안적 삶이 없어요. 도시의 집집마다, 건물마다 설치된 수세식 화장실로 강이 오염되지요, 자가용이다, 에어컨이다, 난방기다하며 모든걸 갖춰 살기를 원합니다. 모든걸 누리고 살면서 생명 환경을 얘기하면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지요. 온갖 문명의 이기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신자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라고 한다면 그게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겠습니까?"

▲ 서정홍 씨는 교구에서 1% 사제를 농촌으로 보내 농사짓게 하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제들에게 농촌에 와서 농사를 지으라고 권한다.

"용기있는 사람부터 농촌으로 올 것입니다. 저는 가끔 교구장님께 사제의 1%를 농업에 투신하게 해달라고 건의합니다. 농사를 지어야 먹거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위해 첫번 째 소중한 직업이 농부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농업에 천주교 지도자인 사제가 한명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주교 사제의 1%가 농촌에 와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땅을 일구며 생명운동을 한다면, 우리 사회는 이 '1%의 아름다운 삶'을 보며 숨통이 트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속한 마산교구에서는 지난 몇년 간 농어촌 전담사제가 파견돼,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지난해 교구청으로 발령받아 갔다고 한다. 서정홍씨는 다시금 전담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합천 삼가공소 회장이기도 한 서정홍씨는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도시에 더이상 성당을 짓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시에 몇 십억 짜리 교회를 짓는 것보다 도시의 신자들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시대가 중심도 없이 흔들릴 때 교회가 해야할 일이 더 많다"고 전제한 서정홍씨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험난한 길, 농업의 길을 가며 생명을 살리며 또다른 농촌 젊은이들을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희망심기"라고 생각한단다.

그는 이 책, <농부시인의 행복론>에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을 담았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농민운동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이야기를 모아 이 땅의 젊은이, 젊은 부부들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도시에만 삶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시선을 틀어도 자연 속에 펼쳐져 있는 생명의 길을 낚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귀농을 꿈꾸는 벗들과 자연생태마을 일궈

실제로 그가 살고 있는 자연생태마을에는 귀농을 꿈꾸는 젊은이가 그와 함께 꿈을 일구고 살고 있다. '귀농을 꿈꾸는 벗'들과 함께 하는 그의 삶에 조롱조롱 행복이 열리는 것은, 그것이 바로 희망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 아닐까.

<깊은 철학과 바른 삶이란 어렵거나 골치 아픈데 있지 않습니다. 식당 주인은 어떻게 하면 찾아오는 손님들의 건강을 지켜줄 것인가를,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는 어떻게 하면 공해를 일으키지 않고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를, 농부들은 어떻게 하면 병든 땅을 살리며 건강한 곡식을 생산할 것인가를, 버스 기사는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편안하게 타고 내릴 것인가를 애써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만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시인의 행복론' 중에서-

"농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1992년이었습니다. 우리밀살리기 운동 출자금을 모을 때였어요. 당시 우리가 먹는 밀가루 100%가 수입산이며, 농약과 방부제 투성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아버지로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내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지키자는 생각으로 농부로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농부로 사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는 서정홍 씨. 그 주변엔 젊은 귀농자들이 모여서 함께 살고 있다.(사진/상인숙 기자)

일찍이 그는 결혼하기 전부터 '가난한 삶'을 지향했다. 집을 사지 않고, 승용차 사지 말고, 가난한 여인을 만나 가난하게 살겠다고 그와 그의 벗 3명이 약속을 했고, 각각 농부와 환경운동가 등의 길을 걷고 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농부로 사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도시에서의 편리하고 화려한 삶을 버리고 생명농업을 시작한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생명농업을 하면 자연 가난할 수 밖에 없다고 덧붙인 서정홍씨는 지금도 자그마한 흙집에 살며, 논밭을 빌려서 소농을 하는 부지런한 농부다.

"소농은 옛날부터 내려온 우리네 농업형태였습니다. 그것이 도시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소농을 없앴고, 농촌이 이처럼 피폐해졌습니다. 소농이 많으면 자연은 자연히 살아납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대농을 장려합니다. 대농은 기계를 쓰고,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씁니다. 바보 중에 이런 바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렇게 지은 농산물의 가격은 싼 편입니다. 농산물 가격이 싸면 싼만큼 환경이 오염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는 7년 남짓 생명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우리 겨레의 목숨을 이어주는 농촌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가슴아파 한다. 늘 대답도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세월만 보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다 그는 그 대답을 쿠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농사를 짓는 나라는 쿠바 밖에 없다지 않은가.

길을 고치는 것보다 생명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

서정홍, <농부시인의 행복론>, 녹색평론사
"누가 외국에 무엇을 배우러 간다고 할 때마다 속으로 '우리나라에도 배울게 얼마나 많은데 비싼 돈들여 외국까지 가냐'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농사일을 배우려고 쿠바로 가려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쿠바에서는 농촌에서만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병원, 관공서, 주택 등 건물과 건물 사이, 빈터마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농장'을 운영합니다. 그곳에는 유기농법으로 기른 갖가지 과일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 쿠바에는 어떤 학교에나 농장이 있습니다."


"길을 고치는 것보다 생명을 고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쿠바는 나라 전체가 유기농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온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날이 갈수록 생태계가 파괴되어 모든 사람들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서정홍씨는 "우리나라 아이들도 아토피 피부염, 알레르기, 비만, 백혈병, 암과 같은 여러가지 질병에 노출돼 있는 것도 생태계가 파괴됐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유기농업 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다.

"어렵더라도 먼저 나를 바꾸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바꾼다는 것은 본디 있던 것을 다르게 갈거나,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디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종교나 학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그는 세상을 향해 '아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귀담아 들어주기'를 바란다. 아이들 마음 속에 '본디 있던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정답도 그 안에 들어있다고 한다. "농촌과 환경과 교육을 살리는 길도, 모든 생명과 사람을 살리는 길도,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세상이야말로 참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그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한없이 흘린 땀으로 영글어질 결실을 향해, 또 한발짝 성큼 내딛는다. 그가 노래하는 '농부의 행복'은 기다리지 않아도 성큼 다가온 가을속에서 더 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산과 들에 쑥부쟁이가 피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왔습니다. 가을,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지게를 지고 산밭으로 가는 내 발걸음이 조금씩 바빠졌습니다. 먼저 익은 대추와 단감을 따야하고 배추밭에서 벌레도 잡아야 합니다. 많이 깨닫고 착한 사람일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논에 심어둔 벼들이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자연 앞에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이지요.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로부터 멀어지면 죽고 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갈등과 죄는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일어난 것입니다.>-'농부시인의 행복론' 중에서-


**서정홍씨는 1990년 '마창노련문학상', 1992년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생명공동체운동'에 첫발을 디딘 후, 우리밀 살리기운동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펼쳤고, 경남 생태귀농학교를 운영했다. 2005년부터 경남 합천의 황매산 기슭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강아지똥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등과 동시집 <우리 집 밥상> <닳지 않은 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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