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누구인가-정중규]

복음의 시작은 광야의 소리(마르 1,1~3), 평생을 광야에서 살았던 야인(野人) 세례자 요한은 그분에 앞서 복음의 길을 닦은 교회의 모태요 텃밭이었다. 공생활을 앞둔 예수께서 그런 광야의 사람을 굳이 찾아가 세례 받으시고,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교회의 눈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야성(野性)이 세속에선 본류가 아니라 지류로 여겨지나 교회만큼은 야성이 본류이다. 교회가 그 야성을 잃어버릴 때면 곧장 교회다움을 잃고 부패에 빠져들고 불의에 귀 어둡고 눈멀어졌지만, 교회 안에 야성이 살아 숨쉬고 ‘예언적 자극’을 주는 장치가 온전히 작동할 때면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충만하였다. 교회쇄신이란 결국 ‘야성의 회복’ 외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교회의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전체 신자 수가 빠르게 증가해 복음화율 10%의 ‘오백만’ 교회라지만, 그에 걸맞게 사회복음화를 위한 ‘예언적 자극’을 사회에다 줄 수 있는 교회장치들이 온전히 작동되고 무엇보다 교회 안에 야성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묵시록에서 사르디스 교회를 향해 질타하신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묵시 3,1)라는 말씀이 실감될 정도로 교회가 야성의 힘을 잃은 늙은 맹수로만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결국 야성이란 젊음이다. 니체(F.W. Nietzsche, 1844~1900)의 “만일 청년 예수가 오래 살았다면 순수한 열정의 산상수훈 복음은 가능했을까?”라는 탄식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복음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심장의 맥박이 늦어지고 굳어진 가슴을 찢을 수 없어 사랑의 시력이 멀어지면서,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갈수록 완고해지게 마련이다.

한국교회인들 예외가 아니다. 외형적 성장만큼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며 외화내빈의 위기에 처한 채 급속도로 침체 침하 침몰되고 있다. 노회한 추기경을 비롯한 원로원 수준의 권위주의적 교계 분위기가 믿음과 사랑과 생명을 압살하는 비극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지난 봄 4대강 사업을 중단을 촉구하던 젊은 사제들의 천막을 '영업방해'란 이유로 무참하게 유린한 명동성당 사태는 드러난 한 예일 따름이다. 그날 명동성당은 하느님의 땅이 아니라 명동성당을 관리하는 ‘그들’의 땅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러 모인 사제들과 신자들을 향해 “이곳은 우리 땅이니 나가라!”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부끄러운 일이다.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 일반 서민들에게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진 공중부양의 신기루만 같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교회가 제시하는 꿈이 그러하고, 외치는 말이 그러하고, 움직이는 몸짓이 그러하다. 피라미드는 무너지지 않았고, 삼중관이 다시 번쩍이고, 권위의 붉은 옷을 걸친 옥상옥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현실도피의 아편 같은 몽환적 기도문들이 넘쳐나고, 게토의 무덤 속 평화가 찬양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은 갇히고, 광야의 외침은 공허하게 떠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떠나고 다시 예언자의 피맺힌 십자가들이 언덕 위에 하나 둘 세워지는데, 제대 위엔 도금된 십자가만 유난히 반짝인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보지만 영적 생명력을 잃은 교회에서 ‘믿고 살’ 맛을 잃은 신자들은 곧바로 냉담해져 교회에서 멀어진다. 그럴 때 신자 수 ‘오백만’이란 그저 통계적 허수일 따름이다!

교회도 인간이다. 인간이 결국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참된 복음화를 향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양적 성장을 질적 성숙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교회 주체들의 보다 개방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와 자기성찰의 예언적 영성이 요구되고 있는 이 때, 교회의 인적 쇄신은 외면할 수 없는 선결과제이다. 잃어버린 예언적 정신과 혼을 되찾을 수 있는 첩경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분별하라”며 ‘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공자의 ‘시중지도(時中之道)’와도 상통하는 말씀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소리가 바로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로 다시 울려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점증하는 바람을 분별해 수용할 수 있는 지도자의 넓고도 깨어있는 열린 마음이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교회의 눈길에 담겨져 있는 다크서클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말끔히 사라지고 해맑은 눈빛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전히 드러낼 아름다운 그날을 그려본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후원회소식지 <기쁨과 희망> 2010년 9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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